많은 현대인은 곧잘 외로움을 호소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손쉽게 친교를 나눌 수 있게 해 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단기간에 붐을 이루게 된 데에도 이러한 현대인의 외로움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것이 그렇듯이 SNS는 양날의 칼이다. 많은 친구와 연결해 외로움을 덜어 주는 도구이면서, 한 사람을 쉽게 난도질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쉽게 말이다.
얼마 전 우리 학교에 다니는 탈북자 학생을 만났는데 표정이 어두웠다. 이유를 물어보니 같은 탈북자 동료가 인터넷에서 공격을 받고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이 동료는 여러 차례 북송되었었고, 그 와중에 아버지는 처형을 당했다. 일부 사람이 이 얘기가 나온 기사를 스크랩한 뒤 ‘북송되면 처형당한다더니 너는 여러 차례 북송되고도 처형되지 않았으니, 그럼 거짓말을 한 것이냐?’, ‘탈북자인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면 처형받을 만한 짓을 한 것 아니냐? 탈북 과정에서 양민 살해나 국경수비대 살해 등을 한 것이 아니냐?’고까지 했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가 살인자로 몰리니, 인터뷰를 한 것에 대해 죄책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SNS에서 더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이는 자신과 남에 대해 적용하는 ‘관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상화한다. 자신의 결점은 잘 보이지 않는 대신 타인에 대한 비판이나 공격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진다.
이런 ‘불관용’의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연예인들에 대한 집단공격이 있다. 유명인의 자살 가운데 일부는 댓글이나 SNS메시지를 통한 인신공격 등으로 인한 ‘사회적 타살’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들의 댓글은 ‘당신이 높은 출연료를 받는 건 우리 같은 일반인 시청자 덕분이니 공인으로서 그 정도는 감수해라’라는 식이다. 자기 자신은 마음껏 연예인들에게 돌을 던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수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이 자신이 지지하는 가수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그 심사위원에게 심한 욕을 하기도 한다. 지지하는 가수가 다르다고 돌을 드는 것이다. 이보다는 좀 더 심각한 주제가 정치일 것이다. 정치적인 견해가 다를 때 서로 심한 공격을 퍼붓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게 되었다.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전혀 참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관용’은 자신과 견해나 취향을 달리하는 사람만을 목표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나 큰 고통을 겪은 사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그 탈북 청소년에 대해서도 ‘별 생각 없이’ 악플을 달았을 것이다.
자살을 생각하며 마지막 도움을 구하는 청소년의 글에 ‘그냥 죽어 버려라’라는 댓글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 ‘아, 이제 우리 사회가 정말 갈 데까지 가 버린 거구나’ 하며 한숨을 쉬게 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 관용이 없는 것일까. 왜 이렇게 잔인해졌을까.
한국 사회는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보이지 않는 무한한 다수를 대상으로 무한 경쟁을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즉 체면이 중요하기에 남들과 늘 비교하면서 산다. 지난해 경기개발연구원에서는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산정했는데, 이는 주민 1명당 평생 1억100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이 비용은 수도권지역 내 총생산의 6.7%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한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생애 주기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경쟁이나, 남과의 비교에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주를 이뤘다.
이러한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는 관용을 더욱 어렵게 한다. 미국 메인대 심리학과 콜리어 교수 등이 2012년에 수행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건강한 경쟁심을 넘어선 과도한 경쟁심과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사람의 ‘용서하는 마음’을 없앤다고 했다. 여유가 없어지는 셈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악성 댓글을 다는 무명의 누리꾼들도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들의 정신세계를 온전한 상태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이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 자신도 지킬 수 없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유명인들에게 내뱉는 비난. 이런 행동을 하면 최소한 그 말을 내뱉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일까. 카타르시스를 느껴서 마음이라도 편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도리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때에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한, 분노라는 감정을 용서로 해소시켰을 때 오히려 면역기능이 향상되고, 혈압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기저기 아픈 신체 증상도 줄어든다고 한다.
용서를 한 사람은 스트레스 상황에도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포용하지 못하고 원한이나 분노를 품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소한 스트레스만 와도 가슴이 뛰고 혈압이 오르는 등 생리적인 반응이 커진다. 심리적인 건강, 즉 마음의 평화가 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남들과의 비교에서 낙오된 것 같아 오는 분노, 그래서 SNS를 통해 정제 없이 쏟아 내는 분노, 이 분노를 무방비로 맞은 자들에게 또 생기는 분노, 이 견딜 수 없는 분노가 결국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향한다. 비극이다. 이 악순환은 어느 고리에선가 끊어져야 한다.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아”, “너는 비록 부족해도, 꼭 승자가 아니어도, 가치 있는 존재야”, “그럴 수 있어. 그런 상황이 누구에게라도 올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집단적 관용 그리고 용서를 통해서만 우리의 비극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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