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로 보내는 음성방송을 수신하는 장치, 곧 라디오를 만들려면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콘덴서, 저항, 코일, 연산증폭기(오피 앰프) 같은 전기부품이 필요하다. 부품을 연결한 뒤, 가변콘덴서(바리콘)를 돌려 ‘지지지지’ 하는 잡음 속에서 주파수를 찾고 가변저항을 조정해서 볼륨을 키웠을 때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직접 만들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작은 부품 몇 개로 만든 장치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정말이지 경이로운 경험이다.
바리콘과 가변저항은 굉장히 예민하다. 조금만 돌려도 잡음투성이가 되고, 소리의 크기가 급변한다. 일자 드라이버로 바리콘을 미세 조정하여 주파수를 맞추는 경험은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손맛일 것이다. 지금은 손잡이를 딸깍딸깍 돌려 원하는 채널을 찾는 방식을 지나 버튼만 누르면 지정된 주파수로 바로 넘어가는 디지털 시대다. 주파수를 맞추기가 너무 쉬워진 것이다.
군부 출신 대통령이 잇달아 집권하던 1980년대까지 주파수를 맞추는 행위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 광석 라디오를 조립하거나 취미로 아마추어 무선(HAM)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주파수를 맞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파수를 맞추는 행위는 북한의 대남방송을 몰래 듣는 것을 의미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무전기는 검은 선글라스를 낀 간첩이나 간첩을 잡는 요원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무선통신은 군용으로 한정됐고, 건설이나 산업 현장에서 제한된 용도로 사용됐기 때문에 대중이 무전기를 만져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손에서나 간혹 보았을까. 무전기가 신기한 꼬마들은 아무 장난감에 대고 “○○ 나와라, 오버” 하며 서로 주파수를 맞추는 놀이를 즐겼다. 그 뒤 주파수를 맞추는 경험은 일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최근 정부조직 개편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국회는 난데없이 주파수를 용도별로 규제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통신용 주파수는 미래창조과학부, 방송용 주파수는 방송통신위원회, 나머지 주파수는 국무총리실이 관할한다는 것이다. 정부 부처가 휴대전화를 통신용, 방송용, 나머지 용도로 나눠 맡는다는 것과 뭐가 다를까?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는 추세를 거슬러 아예 칸막이를 쳐 버리는 황당한 자충수다.
이 같은 억지의 배경에는 뿌리 깊은 트라우마가 숨어 있다. 방송용 주파수에 관한 정책은 방송 장악의 우려가 있다는 전제다. 주파수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간첩으로 몰렸던 불행한 세대의 피해의식이다. 이 트라우마는 국정감사에서 1980년대에는 ‘우편 검열’, 1990년대에는 ‘전화 도청’, 2000년대에는 ‘방송 장악’이라는 단어로 발현된다.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과 야당이 아무리 공수 교대를 해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한꺼번에 도지는 메뉴들이다.
정부조직 개편을 놓고 서로 다른 주파수 대역에서 교신을 고집하면 대화는커녕 통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뒤, 이 불행한 세대의 트라우마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겠다고 합의하면 된다. 이 주파수 대역을 찾았다면 튜닝을 시작해 보자.
주파수를 맞추는 것을 튜닝(tuning)이라고 한다. 기술용어로는 동조(同調), 일반 용어로는 조율(調律)이다. 튜닝을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콘덴서의 용량이나 임피던스(저항 요소)의 값을 변화시키면 된다. 상대의 논리를 수용하는 포용력이나 상대의 요청을 거부하는 저항력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신기하게도 어떤 주파수에서 공진(resonance)이 일어나 상대방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 국회의원들은 라디오를 조립해서 주파수를 맞춰본 경험이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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