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손에 든 한 권의 책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과 핵테러의 현실적 위협을 경고한 ‘핵테러리즘(Nuclear Terrorism)’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저자인 그레이엄 앨리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도 이 전 시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앨리슨 교수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 국방부 차관보로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 위성국들이 보유한 1만4000여 기의 핵무기 감축 협상을 주도한 핵안보 전문가이자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이다.
두 사람은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현실로 성큼 다가선 한반도의 핵 위기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 전 시장은 “북핵 6자회담이 결실을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앨리슨 교수도 “김정일은 만만치 않고(tough), 영리하며(smart), 까다로운(tricky) 인물”이라며 북핵 해결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보탰다.
그로부터 5년 뒤인 지난해 3월 서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두 사람은 각각 대통령과 명예 자문위원으로 다시 만나 머리를 맞대고 북핵 해법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들을 포함해 회의에 참가한 어떤 전문가도 ‘북핵 딜레마’를 해결할 묘책(妙策)을 내놓지 못했다.
6년 전 두 사람이 우려한 이상으로 지금 한반도의 북핵 사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악화됐다. 그 사이 북한은 두 차례나 핵실험을 거듭하며 ‘핵 무장력’을 강화했고, 미국 본토에 다다를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장거리 로켓까지 발사했다. 최근엔 키리졸브 한미연합군사연습을 시비 걸어 정밀 핵타격 수단으로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하지만 북핵 위기 때마다 국제사회가 꺼내 드는 대북제재 카드는 북한의 ‘핵 폭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실상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다.
앨리슨 교수는 책에서 파키스탄의 핵보유국 부상 과정과 ‘불량국가(Rogue State)’를 고객으로 하는 ‘핵판매 비즈니스’의 실상을 파헤쳤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끈끈하고 은밀한 ‘핵-미사일 커넥션’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북핵 위기의 예고편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파키스탄은 2000년대 초부터 북한과의 불순한 거래를 시작으로 핵 제조 장비와 관련 기술을 전 세계에 퍼뜨리면서 많은 증거를 남겨 ‘제1의 핵 확산국’으로 지목됐다.
대한민국을 ‘핵의 인질’로 삼아 핵개발에 몰두하는 북한의 최종 목표는 ’제2의 파키스탄’이 아닐까. 앨리슨 교수도 북한이 매년 10여 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생산 라인을 갖춘 핵보유국으로 부상한다면 다른 불량국가들이나 테러 세력들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 배치해 동족에게 핵전쟁 협박을 일삼으면서 미국을 상대로 핵테러를 꾸미는 외부 테러세력에 핵물질의 판매를 시도한다면…, 사상 초유의 핵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 북한이 핵무기 군축협상 테이블에 앉는다면…. 악몽 같은 시나리오지만 현 북핵 위기를 보면서 무작정 외면할 수도 없는 섬뜩한 상상이다. 세계에서 호전적인 핵 확산국과 등을 맞댄 채 핵전쟁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북핵 위협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핵 문제는 북한과 미국이 담판으로 해결할 ‘남의 일’로 여기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하기야 한때는 “북한이 설마 동족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느냐” “어차피 통일이 되면 북한의 핵무기는 우리 것이 된다”는 ‘핵감상주의’가 횡행했으니….
과거 정부에서 ‘햇볕정책’을 주도한 일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핵개발에 나선 건 미국의 적대정책에 맞서기 위한 불가피한 자구적 수단이라고 했다. 북핵은 대미용이지 결코 대남용이 아니라며 ‘북핵 보유 당위론’까지 설파했다. 지금 북한의 대남 핵 협박을 보면서 그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자조와 비판이 나올 만하다. 북한의 핵 공갈에 이대로 운명을 맡길 것인가. 국가 생존이 걸린 ‘발등의 불’로 여기고 정부와 국민이 수단과 방책을 강구할 것인가. 한반도의 미래를 가를 ‘북핵 시계(時計)’는 지금도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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