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단순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능한 한 대국적이고 객관적으로 말하면 한반도 분단은 민족자결주의 등 보편적인 원칙을 중시하는 미국 외교와 자국의 지정학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옛 소련(현 러시아) 외교의 충돌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문제를 ‘극동에 이식된 폴란드 문제’라고 한 헨리 스팀슨 전 미국 육군 장관의 지적은 그런 맥락에서 정곡을 찌른다.
그럼 광복 이후에 나타난 ‘분단 상태’는 무엇일까. 38선을 경계로 미소에 따른 분할 점령 결과 한반도에는 ‘독립정부를 수립하려면 통일을 포기해야 하고, 통일하려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분단 상태가 나타난 것이다.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뒤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통일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통일은 실현되지 못했다. 미국과 중국이 참전했지만 어느 측도 군사적으로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휴전 이후 1960년대 초까지 2개의 동맹체제가 대치하는 형태로 남북 사이 상호억지(抑止) 체제가 성립됐다. 그게 ‘분단 체제’다.
미중소가 관여하는 ‘분단 체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6·25전쟁과 같은 전면전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평화 역시 가능하지 않았다. 전쟁의 불가능성이 확인됐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까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군사도발이 가능해졌다. 그게 ‘분단 체제의 역설’이다.
사실 1960년대 후반 이후 전쟁에까지 이르지 않는 ‘저(低)강도 분쟁’이 빈발했다. 북한이 전쟁 이외의 폭력적인 수단으로 ‘남조선혁명’, 즉 조국통일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내부적인 정권 전복이라면 미군도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청와대 습격사건, 문세광 사건 등이 그 전형이다.
한국 측이 ‘북한 혁명’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한미군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969년 4월 미국 첩보기 EC121기 격추 사건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전쟁 재발의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의 목적은 전쟁 억지다.
상호억지 체제라고 해도 무력도발의 주도권에 관한 한 남북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분명히 존재했다. 북한의 요청에 따라 1958년 중국군이 물러난 이후 북한에는 작전통제권 문제가 없었다. 분단 체제의 역설을 이용해 북한은 ‘도발의 자유’를 누린 것이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1987년 KAL기 폭파부터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까지 북한은 전쟁으로 번질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 군사도발은 자제해 왔다. 냉전이 동쪽 진영의 패배로 끝나고 중국이 한국을 승인한 결과 분단 체제를 떠받들던 상호억지 기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 사이 북한은 체제존속 위기에 직면했다.
그럼 왜 만년의 김정일과 새로 등장한 김정은은 ‘자제’를 포기한 것일까. 지금까지 약 20년간 북한이 동원 가능한 자원의 대부분을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동원해 온 것을 생각하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 핵무기와 미사일의 결합으로 새로운 독자적인 억지력을 획득하고자 하고 있다.
중국의 대국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국화한 중국은 북한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상호억지 기능을 부활시키려 할 것이다. 북한의 독자적인 억지력 구축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무력도발은 한미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중국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그 지적이 맞는 것이라면 지난해 12월 이후 도발은 냉전시대의 무력도발과 다른 위험성을 의미한다. 북한이 독자적인 억지력을 구축해 상호억지 기능을 변질시켰기 때문에 한국은 정전협정 60주년을 앞두고 모든 종류와 수준의 무력도발을 상정하고 주의 깊게 적절한 수단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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