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용]대통령의 이니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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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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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입대 후 신병들은 ‘56번 훈련병’처럼 번호로 불린다. 20년 넘게 쓰던 이름을 잃어버리니 사회와 이어주는 끈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허전함을 느낀다. 국민의 지지를 먹고사는 정치인에게 무명(無名)과 무관(無冠)은 더 큰 고통이다. 그들이 인사나 선거철이 되면 “본인 부고(訃告)만 빼고 신문에 이름이 실리면 무조건 좋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간다. 이름과 호칭은 정치인에겐 존재의 의미다.

▷1960년대까지 정치인들은 아호(雅號)로 불렸다.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죽산 조봉암…. ‘이 박사’ ‘조 박사’처럼 당시 흔치 않은 박사 학력을 붙여 무게감을 더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영문 이니셜 호칭이 등장했다. ‘JP’(김종필 전 국무총리) ‘HR’(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처럼 공화당 실세들이 영문 약자로 불리며 위세를 과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청와대 안팎에서 ‘프레지던트 박’을 뜻하는 ‘PP’로 불렸다. ‘3김 시대’ 이후엔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 ‘MB’(이명박 전 대통령)가 대통령 호칭으로 굳어졌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JFK’(존 F 케네디)처럼 약칭으로 부르긴 하지만 우리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정직한 에이브’(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처럼 이름이나 성격, 재직 중 업적 등에 대한 평가가 녹아 있는 애칭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 이니셜 애칭이 생겼다는 것은 힘이 세졌다는 신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은 MB가 대권에 도전한 뒤 ‘SD’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대권을 노리는 일부 중진 의원은 대놓고 기자들에게 자신의 이니셜을 불러주며 애용해 달라고 주문한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도 경쟁자인 YS나 DJ처럼 자신을 ‘CY’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 들린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호칭을 영문 이니셜을 딴 ‘GH’나 ‘PP’ 대신 ‘박 대통령’으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어떤 사람이 GH를 ‘그레이트 하모니(Great Harmony)’로 붙여줬다”고 소개한 적도 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갑자기 영어 이니셜이 싫다고 하니 국민은 의아스럽다. 애칭이나 약칭은 국민과 언론이 지어주는 것이다. 대통령이 주문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뀔 일이 아니다. DJ는 후광(後廣), YS는 거산(巨山)이라는 아호가 있었지만 언론이 영어 이니셜을 선호하는 바람에 요즘은 들어보기 어렵다. 국민과 소통하려면 ‘이니셜 호칭’이라도 있는 대통령이 없는 대통령보다는 낫다. 박 대통령이 국민과 친해질 기회를 스스로 막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
#대통령#이니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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