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뒤 그 이듬해를 희년(禧年)으로 정해 경축했다. 영어로 희년을 뜻하는 ‘주빌리(Jubilee)’란 말은 숫양의 뿔을 일컫는 히브리어 요벨(yobel)에서 음을 따온 말. 50년에 한 번 돌아오는 이 해에 유대인들은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며 희년의 도래를 알렸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 해에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이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고 가난으로 조상의 땅을 판 사람들에게 땅을 돌려줬다. 누적된 경제적 불평등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 문제가 생긴 PC를 껐다가 다시 켜듯 사회를 50년마다 ‘리셋(reset)’했던 것이다.
고대 이후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관습은 사라졌다. 희년이 역사에 다시 등장한 건 기원 후 1300년. 유럽 전역이 전쟁과 전염병으로 혼란을 겪던 시절 구원을 찾아 로마로 순례자들이 몰려들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그해를 가톨릭교회의 첫 번째 희년으로 정했다. 이 해에 참회하고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죄를 사해줬다. 100년에 한번이었던 희년은 이후 50년, 33년, 25년으로 주기가 짧아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계부채 문제와 ‘내 집 빈곤층(하우스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 ‘국민행복기금’은 유대인의 희년제도를 연상시킨다. 18조 원의 막대한 기금을 만들어 은행, 카드회사, 저축은행, 대부업체 등 여러 곳에 빚을 진 저소득 다중채무자의 빚을 최고 50%(기초생활수급자는 70%)까지 탕감해 재기의 기회를 주는 제도다. 대통령의 ‘1호 공약’인 만큼 새로 짜여진 금융당국은 금융회사들을 재촉해 당장이라도 시행할 기세다.
부채 탕감이란 ‘선정적’ 정책이 21세기에 대선 공약으로 등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고속성장기 동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전력 질주하는 사이 선두와 말미의 차이는 크게 벌어졌다. 마침 한국 경제성장의 출발점인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된 게 51년 전이어서 기간도 고대 희년과 비슷하다.
줄곧 오르기만 하던 집값이 경기침체와 저성장, 고령화 등의 영향으로 대세 하락기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집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투자자들의 잘못된 믿음에 1차적 책임이 있지만 중산, 서민층 다수가 고통 받는 만큼 일부 손실을 감수하게 하더라도 재기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부채를 탕감해주는 희년제도가 왜 고대에만 존재했는지 꼼꼼히 살펴보면 정책의 위험성이 드러난다. 혈연으로 맺어진 사회는 자기 씨족이나 부족의 지속성을 위협하는 불안요인을 없애기 위해 부채탕감이란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금융을 통해 채권과 채무가 거미줄처럼 얽힌 신용사회다. 부채탕감 같은 조치가 있을 때마다 신용과 재산권이라는 사회의 기본질서는 위협받는다.
몇몇 역사가들은 고향을 잃고 유럽 전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 등 금융업에 종사한 점을 희년이 사라진 이유로 꼽는다. 부활된 가톨릭교회의 희년 탕감 목록에 ‘죄’는 있어도 ‘부채’가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게다가 고대의 평균수명은 기껏해야 30대. 희년은 보통 2, 3대에, 운 좋은 사람만 당대에 한 번 맞는 드문 일이었다.
신제윤 신임 금융위원장은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장기연체자 지원은 ‘공짜 점심’이 아니다. 자발적 신청으로 자활의지를 보인 사람을 대상으로 ‘한 차례’에 한해 한시적으로만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1회성’을 강조했다. 금융 당국자치고 부채탕감 정책의 위험성을 모르는 이는 없다. 아무리 단 한번이라 해도 정부는 ‘리셋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이 정책이 불러올 부작용과 위험을 다시 한 번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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