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행을 준비하던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검찰이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는 지난해 대선 때 불거진 국정원 여직원의 선거 개입 댓글 의혹 및 최근 민주통합당이 제기한 국정원장의 정치 개입 지시 의혹 등과 관련해 여러 건의 고소 고발을 당해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21일 퇴임한 원 전 원장은 24일 미국으로 떠나 스탠퍼드대에 머물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위 관료들이 임기를 마친 뒤 연구와 유학 등을 이유로 장기간 해외에 머무르는 관행으로 볼 때 그가 이번에 출국했을 경우 당분간 국내에 돌아오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다. 이명박 정권에서 4년간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일한 그가 고소 고발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 외국으로 나가려고 한 것은 도피성 출국이라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퇴임 후 납치 등을 우려해 일정 기간 경호원이 따라붙는 전직 국정원장의 신분에도 어울리지 않는 무책임한 처신이다.
원 전 원장의 정치 개입 의혹은 국정원의 정상적인 업무 범위에 해당하느냐를 두고 다툼의 여지가 있는 사안이다. 국정원 여직원의 선거 개입 댓글 의혹은 국회의 국정조사까지 예정되어 있다. 의혹의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그가 해외로 훌쩍 떠나 버린다면 수사는 표류하고 이를 둘러싼 세간의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될 것이 뻔하다. 본인이 떳떳하다면 국내에 머무르며 검찰 수사와 국정 조사에 당당히 대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원 전 원장의 정치 개입 의혹이 폭로되는 과정에서 국정원의 내부 통신망에 오른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는 일도 벌어졌다. 정권 교체기를 틈타 국정원 직원들의 정치권 줄 대기 같은 구태를 혁파하는 차원에서도 원 전 원장은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지난 주말 언론 보도를 통해 원 전 원장의 미국행 소식이 알려지자 야권은 “원 전 원장이 퇴임 사흘 만에 국외로 떠나는 것은 도피성 출국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그에 대한 출국금지를 촉구했다. 하지만 검찰은 야당이 요구하기 이전에 이미 원 전 원장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국정원장이 퇴임하자마자 출국금지 조치를 한 속사정이 궁금하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다른 사유가 있어 그의 출국을 막은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수사의 전개 상황에 따라서는 이명박 정권 인사에 대한 사정의 신호탄이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