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82>지상의 방 한 칸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25일 03시 00분


지상의 방 한 칸
―이시영(1949∼)

신림 7동, 난곡 아랫마을에 산 적이 있지. 대림동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갔던가, 변전소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가.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 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 여름밤이면 집 앞 실개천으로 웃마을 돈사의 돼지똥들이 향기롭게 떠가는 것을 보며 수제비를 먹었지.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하던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눈이 커다란 간호원에게 매일 아침 붉은 엉덩이를 내리고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대씩 맞고 다녔지. 학교가 너무 멀어 오전 수업을 늘 빼먹어야 했던 집. 아니 결핵을 앓던 나를 따스히 보살펴 주던 집. 겨울이면 루핑이 심하게 울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던 방. 아니 봄을 기다리던 누님과 나의 지상의 좁은 방 한 칸.

난곡(蘭谷), 난초의 골짜기. 서울 도심 판자촌 철거 정책에 떠밀려온 사람들이 실개천 흐르는 이 난초의 골짜기에 마을을 이룬 게 1967년. 그 뒤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 하나가 됐다. 교통 불편한 건 더 말할 것 없고, 위생과도 안락과도 거리가 먼 주거환경. 시에 나오는 것 같은 한 칸 방에 대개 8, 9명 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이 된 지금, 그들은 거의 어디에론가 떠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채 철거되지 않은 집에 산다고.

루핑, 아스팔트를 입힌 천으로 지붕을 덮은 집. 그게 어떤 거지? 요즘 젊은이들에겐 상상도 안 될 것이다. 그들에게 수제비란 얇게 민 밀가루 반죽이랑 애호박이랑 감자를 사골국물에 숭숭 썰어 넣고 끓여서, 다진 쇠고기 볶음이랑 계란지단을 올린, 어쩌다 별미로 먹어주는 그런 수제비일 테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시의 시대적 배경은 사십여 년 전, 1960년대나 1970년대. 방 한 칸에서 다 큰 남정네가 홀로 된 누나랑 어린 조카들이랑 ‘오골오골’ 산다. 화자는 식구 중 유일한 장정이니 경제적으로도 힘이 되면 좋았겠지만 병약한 대학생. 평범하고 초라한 일상사를 그렸는데 묘하게 아름답다. 가난해도 각박하지 않은 삶이 거기 있기 때문이리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누나의, 그리고 화자 자신의 젊은 날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 화선지에 붓질한 먹물처럼 번진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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