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프란치스코를 사랑한다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나는 프란치스코의 스캔들이 될까요, 그 깊디깊은 사랑의 에너지로 하느님에게 가닿을까요? 이번 교황이 내가 사랑한 남자, 프란치스코, 그 아름다운 이름을 선택했네요.
그런 사람의 이름은 단순한 의례나 멋이 아니라 지향성이고 불씨지요? 프란치스코를 사랑한 남자답게 방탄차를 타지 않고,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인사하고, 아픈 사람들을 축복하는 온화한 교황을 보며 교황청에 해가 뜨고 있다고 느낍니다.
사실 프란치스코는 누구보다도 클라라가 사랑한 남자, 클라라를 사랑한 남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지 않나요?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불안을, 의혹이 많은 사람은 분노를, 감정적인 사람은 격정을, 집착이 많은 사람은 편견과 질투를, 온화한 사람은 편안함을 줍니다. 그러면 거지처럼 탁발하며 살아도 왕처럼 자유로웠던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적 불꽃이었습니다. 시피 백작의 딸 클라라는 우연히 맨발에 누더기를 걸치고 아시시의 골목길을 지나가는 프란치스코를 만나 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랑이 있나 봅니다. 신분도, 재산도, 젊음도, 심지어 아름다움까지도 다 버릴 수 있는 사랑! 프란치스코와의 사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좋은 것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덕에 눈을 내면으로 돌리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녀는 더 깊은 세상을 만났고, 아시시에 가면 아직도 그녀가 만난 세상의 흔적이 성클라라 성당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녀원에서 하느님을 전하고 가는 프란치스코에게 클라라가 해 드릴 수 있을 것을 묻자 프란치스코는 말했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헝겊 한 조각씩을 얻어서 수도복을 지어 달라고. 13세기, 가난한 사람들이 입은 누더기 옷은 그들이 가진 옷의 전부였습니다. 그들 속에 들어가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헝겊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어디서 하느님을 찾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일 것입니다. 클라라는 몇 년의 시간을 들여 세상에서 한 벌뿐인 옷을 한 땀 한 땀 완성해 갔고, 그 옷을 받아든 프란치스코는 헝겊 조각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가난을 축복했습니다. 평생 몇 번 만나지도 않은 그들이 왜 최고의 연인인지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삶이 송두리째 변하며 진화하는 만남이 있나 봅니다.
가난한 사람과 살았으나 가난한 사람과 살지 않은 사람을 욕하지 않은 구도자! 절대적으로 신을 믿었으나 자기가 본 신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은 성자! 오히려 자신은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며 신에 대한 무지를 고백한 그는 논리적인 말로 신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다만 악기통처럼 자신을 비워 신의 음악이 연주되도록 했습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변화시키려는 용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그의 기도는 신의 악기가 빚어 낸 울림이었던 것입니다.
‘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는 묘비를 가진 니코스 카잔차키스 역시 프란치스코를 사랑한 남자입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에 매료되어 프란치스코의 흔적을 찾아 미친 듯 돌아다녔고 마침내 ‘성자 프란치스코’를 썼습니다. 글을 쓰며 원고지에 사랑과 감탄의 눈물을 떨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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