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85>대본 읽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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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읽기
―김창완 (1954∼)

햇살 뿌연 회의실에 둘러앉아 대본을 읽는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임금을 읽고

빨간 추리닝을 입고 대감을 읽는다

백정은 운동화를 신었고

며느리는 슬리퍼를 달랑거리고 있다

대사가 없는 노복은 문자를 보내고 있고

조연출은 읽는 사람들을 눈동자로 좇아다닌다

공주는 계속 연필만 돌리고 있고

성질 급한 감독님은 지문을 읽다

배우들 대사도 따라 읽는다 더 큰 소리로

중전이 읽으면 대궐이 된다

할아범이 읽으면 초가집이 되고

의원이 읽으면 약방이 되고

포졸이 고함치면 포도청이 된다

바람이 불고 비 오고 눈 오고 세월 흐르고

말이 달리고 화살이 날아가고

영감이 죽고 아기가 나온다

그러나 바로 거기도 바로 그때도 바로 그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한낮의 풍경이다

이 시를 지은 이는 록밴드 ‘산울림’ 멤버인 바로 그 김창완이다. 방송인이자 배우로 활약하면서, 몇 해 전에는 ‘사일런트 머신 길자’라는 썩 읽음직스러운 소설집도 냈다. 한 가지 재능을 타고나기도 힘든데 참 재능이 많으시다. 하느님이 맡기시는 대로 모든 배역을 즐거이 연기하신다고나 할까. 혹시 나도 뭔가 재능을 타고났는데 그냥 묻어버리고 만 게 아닐까, 곰곰 생각해 본다.

‘대본 읽기’는 격월간 동시전문지 ‘동시마중’ 2013년 3·4월호에 실린 김창완의 다섯 작품에서 골랐다. 배우와 연출가라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 그들의 직장인 방송사 안에서 대본을 연습하는 풍경이다. 대본연습을 할 때는 저마다 임금, 대감, 백정, 할아범, 며느리 등의 페르소나를 갖고 열중한다. 순간 현장은 대궐이 되고 초가집이 되고 ‘바람 불고 비 오고 눈 오고 세월 흐른다’. 그런데 그건 현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빨간 추리닝을 입고 슬리퍼를 달랑거리고 문자를 보내고 있는, 유리창에서 햇살 뿌옇게 들이비치는 방송사 회의실. ‘그저 한낮의 풍경이다’는 마지막 시행을 읽으며 왠지 ‘일장춘몽’이란 말이 떠올랐다. 흔한 말대로, 어쩌면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닐까? 오늘은 만우절, 유쾌한 대본 즐기세요!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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