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의 경제 프리즘]원칙 vs 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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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2일 03시 00분


허승호 논설위원
허승호 논설위원
신동규 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이명박(MB) 정부 때 외풍 없이 공공기관장에 선임된 드문 경우다. 작년 6월 그는 한 헤드헌트사로부터 ‘농협금융 회장 후보에 당신 이름을 올렸다’며 이것저것 묻는 전화를 받았다. “내정자가 있을 것이다. 들러리 설 처지가 아니다”라며 끊었지만 열흘쯤 후엔 회장추천위로부터 “당신이 최종 단독후보다. 인터뷰하자”는 연락이 왔다.

취임 후 경위를 알아봤다. 농협금융의 최대주주인 농협중앙회의 최원병 회장이 회추위에 전권을 넘긴 후 장기출국 해버렸고, 헤드헌트사는 50명의 후보 명단을 회추위에 올렸으며, 후보를 좁혀가는 막판에 ‘청와대의 복안은 다른 사람이다’라는 논란이 있어 확인한 결과 “그런 것 없다”는 답변이 와 회추위 뜻대로 했다는 것. 자율인사의 핵심은 전권 위임과 외풍 차단이었다.

주변에서는 ‘최원병 회장이 MB의 동지상고 후배여서 아무도 감히 간여 못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신 회장은 ‘MB 덕분’에 된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MB 요인이 없었다면 외풍이 불 수 있었고, 그랬다면 회장이 안 됐을 수 있다. 새 정부는 이런 경우도 ‘MB 인사’라며 교체하려 들까.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요새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자신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청와대가 공공기관장 물갈이에 워낙 열을 올리고 있어서다. 말로는 전문성과 국정철학을 내세우지만 ‘내 사람 챙기기’임을 모를 바보는 없다. 작년 발표된 ‘2011 공공기관장 경영평가’에서 평가대상 70명 중 A급 11명(최상위 S급은 없었다) 안에 든 이지송 LH공사, 김건호 수자원공사 사장도 물러난 마당이니 말이다. 이럴 거라면 비싼 세금 써가며 기관평가는 왜 했을까.

공공기관장은 무늬만 공모제일 뿐 은밀히 내정해놓고 절차만 밟는 방식이어서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 전 MB의 낙하산 인사를 비판했다. 대통령직인수위는 “공공기관장 인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겠다. 이를 위해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과 인수위의 말은 아직 유효한가.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인사를 장차관에 임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공기업 사장이 정권과 국정철학을 공유할 일은 없다. 역량과 성과로 충분하다. 완전 민영화돼 정부가 인사에 개입할 근거가 전혀 없는 KT나 포스코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떤 자리에 선임 절차나 임기를 정해둔 것은 ‘그것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낙하산 인사가 더 낫다’ 혹은 ‘정권교체기에는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설혹 그렇다면 절차를 무시할 게 아니라 “제도를 바꾸자”고 요구하는 게 옳다. 이번에 꼭 사람을 바꿔야겠다면 “적어도 이번만큼은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제도 개정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며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안 물러나면 먼지 털기를 시작할 듯’ 어르는 방식은 더이상 안 된다.

공영방송 사장도 마찬가지다. 민주화 이후에도 대통령이 되면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사장을 바꿨고, 공정성 시비가 반복됐다. 굴레를 끊으려면 어떤 대통령이든 한번은 손해 봐야 한다. 공정성 시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장이 나와 개혁을 추진해야 우리도 BBC, NHK 같은 방송을 갖게 된다. 그게 돈 한 푼 안 들이고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쌓는 길이다.

박 대통령은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을 자임한다. 감당하기 힘든 공약이 많아 신뢰는 쉽지 않게 됐다. 그렇다면 원칙이 남았다. 열린 사회, 선진사회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 뭘까. ‘권력의 형성 및 그 행사에 관한 원칙’이다. 원칙의 반대는 반칙 꼼수 편법이다. 요즘 새 정부가 공기업 인사를 놓고 반칙 꼼수 쪽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제도에 없는, 불투명한 권력의 행사는 수십 년 전 아버지 때로 충분하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신동규#농협금융지주#공공기관장#공영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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