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은 청와대 ‘어공(어쩌다 공무원)’의 수장이다. 요즘 그의 속은 반쯤 숯덩이가 돼 있을 것 같다. 복수의 여권 인사들은 “최근 보니 얼굴 살이 쏙 빠지고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고 전했다. 며칠 전 당정청 워크숍에선 그의 표현대로 ‘공포스러운 질책’을 듣고 고개를 떨궜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를 초대 비서실장으로 낙점한 구체적인 경위를 놓고 “염두에 뒀던 사람이 고사하는 바람에…” 등의 분분한 관측이 나왔지만 무엇보다 ‘권력의 2인자’ ‘넘버 2’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중론이었다. 특정인으로의 권력 쏠림 및 이로 인해 야기될 수도 있는 여권 내 권력 암투를 막기 위해 정치 야욕이 덜한 68세의 전직 3선 의원을 택했다는 것이다.
사실 허 실장은 ‘보스형’ 정치인은 아니다. 지금은 어공의 수장이지만 관료 출신이라는 딱지가 따라다닌다. 그의 잔뼈가 굵은 과거 내무부는 공직사회의 ‘갑’이었다. 내무부는 ‘민간 군대’라는 말을 들을 만큼 상명하복 문화도 강했다. 내무부에서 25년을 지내며 형성된 특유의 내무 관료 기질은 정치인으로의 변신 이후에도 크게 바뀌진 않았다는 게 몇몇 친박 인사의 평이다. 2000년 총선 때 서울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온 노무현 전 대통령을 꺾고 첫 금배지를 달았으나 현역 의원 12년 동안 자신만의 정치적 색깔이나 야심을 뚜렷이 드러낸 적이 별로 없다. 박 대통령이 이른바 ‘왕(王)실장’ 대신 말 그대로 관리형으로 그를 선택한 이유다.
그런 점에선 허 실장에게 정권 초반 인사 난맥의 책임을 묻기엔 애매한 측면이 없지 않다. 책임과 권한은 함께 가는 법이다. 따지고 보면 명목상 인사위원장이라고는 하지만 허 실장은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 게 거의 없다. 한 전직 언론인을 홍보수석실 소속 비서관에 넣으려다가 박 대통령의 “이분은 왜 들어갔나요?”라는 한마디에 슬그머니 철회했다는 소문이 여의도에 파다했을 정도다. 속사정이 이러하니 내심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다.
허나, 박 대통령이 비서실장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분명한 건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무한 보좌하고 무한 책임을 지는 자리라는 사실이다. 동아일보가 대선 직후 ‘인사가 만사다’ 시리즈에서 제시한 비서실장의 5대 덕목 중 첫 번째도 ‘대통령 대신 욕먹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사 참사에 대한 그의 ‘17초짜리 대독(代讀) 사과’는 온몸을 던지겠다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자 실장’을 자처했다. “비서실장은 귀는 있지만 입은 없다”는 게 임명 당일 일성이었다. 비서실장의 입이 가벼워선 안 된다는 뜻이겠지만 소극적이고 수동적 역할 인식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일을 찾아서 하는 쪽인가, 아니면 주어진 일만 충실히 이행하는 쪽인가” “국정 제1참모로서 혹시 대통령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경우 내 의견을 개진하고 경우에 따라 끝까지 관철시킬 수 있는 배짱(guts)과 간언의 기술을 갖고 있는가.”
역대 대통령들은 집권 1년차엔 그나마 참모들의 말을 좀 듣다가 집권 2년차부터는 뭘 보고하려고 하면 “아 그거? 됐어. 다 알고 있으니…”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고 정권 참여자들은 회고한다. 그러나 이 정부에선 벌써부터 청와대 참모들과 장관들이 대통령 어록 받아쓰기에 바쁘다.
굳이 ‘황제를 노하게 하면서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는 중국 명신 위징의 사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입 달린’ 참모들이 좀 나와야 한다. 허 실장부터 본관에 올라갈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보고일 수 있다”는 각오로 대통령을 만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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