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MB)정부는 첫 각료 인사에서 박은경 씨와 이춘호 씨를 각각 환경부 장관, 여성부 장관으로 내정했지만 둘 다 부동산 문제로 낙마했다. “건강검진 결과 유방암이 아니라고 해서 남편이 오피스텔을 사줬다”는 이 씨의 발언은 큰 화제를 모아서 당시 “나도 유방암이 아닌데 당신은 뭘 해줄 거냐”는 아내의 시달림을 받은 남편들이 꽤 있었다. 환경운동에 열성적이었던 박 씨도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상관없다”는 해괴한 해명이 역풍을 불러 사퇴했다. MB정부는 검증 통과가 무난했던 변도윤 여성부 장관을 찾아내 여성 장관 한 명의 내각을 출범시켰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여성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갖고 있었다. 1948년에 임영신을 상공부 장관에 임명했고 1950년 김활란 공보처장, 1952년 박현숙 무임소 장관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여성 장관의 불모지였다. 1979년 12월 최규하 대통령이 김옥길을 문교부 장관에 등용하기까지 25년간 여성 장관이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기에는 김정례 보건사회부 장관이 유일한 여성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그의 호방한 리더십은 남성 장관들을 주눅 들게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여성 문제를 담당하는 정무2장관실을 신설해 4명의 장관을 임용했다. 그러나 여성 몫인 데다 나눠 먹기식이었다. 여성계 인사들이 장관 자리를 탐내는 관행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여성 장관 시대는 김영삼 대통령이 열었다. 장관 24명 가운데 황산성 환경처 장관, 박양실 보사부 장관, 권영자 정무2장관이 여성이었다. 여성 장관이 검증 문제로 도마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각료 검증의 첫 유탄을 김상철 서울시장과 박 장관이 맞았다. 박 장관이 부동산 투기로 낙마한 이래 부동산 문제는 여성 장관의 악몽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부인 이희호 여사의 영향 때문인지 많은 여성을 등용했다. 신낙균 주양자 김모임 손숙 김명자 한명숙 씨 등 6명이 장관을 지냈다. 여성특위위원장은 뺀 수치다. 손숙 장관은 러시아 공연 무대에서 돈 봉투를 받았다는 이유로 한 달 만에 사퇴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얼토당토않은 이유였지만 과도하다 싶은 공격을 받았다. 박양실 장관처럼 의사였던 주 장관은 부동산 투기 의혹과 거짓해명으로 낙마했다. 자고 일어나면 터지는 부동산 의혹에 대해 그는 “노후에 부동산 임대업을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손 장관 대신 전문가형으로 발탁된 김명자 장관은 성공적 업무 수행으로 여성 각료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고 한 장관은 최초의 여성 총리까지 지냈으니 어쨌거나 김 대통령의 여성 투자는 ‘절반의 결실’은 이룬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첫 내각에서 강금실 김화중 한명숙 지은희 장관을 임명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노 대통령의 여성 발탁은 전문성보다는 친분이나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청문 과정에서 낙마한 경우는 없었다. 무엇보다 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를 임명한 것은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을 제외하고 박근혜정부의 유일한 여성 장관으로 기대를 모았던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가 청문 과정에서 심각한 자질 부족을 드러냈다. 한 새누리당 의원은 “지금까지 경험한 장관 중에 단연 1등이다. 다만 끝에서부터”라고 말했다. 박근혜정부가 인사 실패에 대해 사과 아닌 사과를 하며 인사 문제를 매듭지은 상태에서 고민이 클 것이다. 윤 후보는 무기중개업체의 로비스트 전관예우, 해외 탈세 등 도덕성 논란에 휘말린 다른 후보와는 경우가 다르다. ‘함량 미달’은 치명적 결함이다. 이제부터 해수부가 일을 할 때마다 장관의 역량이 도마에 오를 것이고 언론은 돋보기를 들이댈 것이다. 깜냥이 되는 여성도 많을 텐데 여성 대통령이 여성 장관을 잘못 골라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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