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들은 과거 네덜란드산 토마토를 ‘물폭탄’이라고 놀렸다. 거칠고 맛이 없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16세기 스페인 정복자가 남미에서 가져온 토마토는 남유럽과 궁합이 잘 맞았으나 춥고 흐린 날이 많은 북쪽의 네덜란드에서는 상품성이 떨어졌다. 경제논리로 보면 네덜란드는 토마토를 사다 먹고 다른 품목을 수출하는 게 나았다.
네덜란드는 뻔한 생각을 뒤엎었다. 1990년대 해외시장으로 치고 들어가 유럽 토마토 시장을 뒤집었다. 인구 1600만 명의 네덜란드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 국가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토마토를 해외에 내다파는 세계 최대 수출국이 됐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햇볕이 조금이라도 있는 게 아예 없는 것보다 낫다’는 네덜란드 농부의 창조적 도전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지중해산 토마토가 신의 선물이라면 네덜란드산 토마토는 인간의 작품이다. 농민들은 온도 습도 등을 컴퓨터로 자동 조절하는 첨단 유리온실 수경재배 농법을 개발해 불리한 자연환경을 이겨냈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맨땅에 농사를 짓는 그리스 농가의 10배다. 대량주문을 받아 신선한 토마토를 바로 따서 납품하는 똑똑한 유통시스템도 만들었다. 이러니 날씨와 땅만 믿고 안주한 남유럽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소개한 ‘95%가 과학기술이고 5%만이 노동’인 네덜란드 창조농업의 힘이다.
우리 농가의 현실은 안타깝게도 네덜란드보다 남유럽과 더 닮아 있다. 정부가 토마토를 14대 수출전략 농식품으로 지정했지만 수출 비중은 1%에도 못 미친다. 보호막이 있는 안방 시장에서 더 높은 값을 받는데 기술과 돈을 투자해 해외시장을 개척할 필요도 별로 없다. 수출업체 열 중 여덟은 “국내 가격이 오르면 수출 계약을 깨고 내수로 물량을 돌리는 영세농가가 많다”고 하소연한다.
자본과 기술이 들어올 길도 막막하다. 동부그룹 계열사인 동부팜한농은 최근 경기 화옹간척지에 네덜란드 농법을 배워 초대형 유리온실을 짓고 수출용 토마토를 재배하려다가 “대기업이 밥그릇을 뺏어간다”는 농민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 회사는 “일반 농가의 주력 상품이 아닌 유럽계 붉은빛 토마토를 재배해 수출하겠다” “농민단체 등이 사외이사나 지분을 참여해도 좋다”고 제안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380억 원 넘게 투자한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대기업이 발을 빼면 시장은 당분간 농가 차지겠지만 미래가 밝진 않다. 토마토 재배면적은 감소 추세다. 한국산 토마토는 1990년대 일본이 수입하는 토마토의 80%를 넘게 차지했지만 깐깐한 검역과 미국과 뉴질랜드의 추격에 걸려 2010년 30%대로 추락했다. 논란이 된 붉은빛 토마토 생산성은 네덜란드의 15%에 그친다.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로 빗장까지 열리면 토마토 시장의 안방 사수도 버거워 보인다. 생산성을 높이고 수출길을 넓혀야 승산이 있다.
정부가 창조경제를 말하고 세금을 퍼부어도 네덜란드처럼 자본과 기술, 가슴이 펄떡펄떡 뛰는 농민들의 무한도전이 없으면 헛일이다. 좁은 내수시장에 돋보기를 들이대면 밥그릇 싸움만 남는다. 망원경으로 세계시장을 멀리 내다보면 대기업도 좋은 파트너가 된다. 대기업이 기술과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농가는 노하우를 얻어 파이를 키우는 창조농업의 길은 없었을까. 토마토 전쟁의 뒤끝이 영 찜찜하다.
신시아 몽고메리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당신은 전략가입니까’라는 책에서 전략가에게 주는 교훈으로 ‘평정을 구하는 기도’ 한 대목을 소개했다.
“하느님,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정의 마음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를 분간할 지혜를 주소서.”
우리는 창조농업을 위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 정부와 농가는 이를 분간할 지혜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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