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고시제도는 ‘창조경제’를 가로막는 암초다

  • Array
  • 입력 2013년 4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학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학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인문학 공부 열풍이 불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홀대받던 인문학이 다시 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문학 공부가 ‘사치재(luxuries)’이기 때문이다. 명품 가방처럼 소득수준이 상승할 때 수요가 큰 폭으로 증가하는 재화를 경제학에서는 사치재라 부른다.

인문학은 사치재에 머물러야지 ‘필수재(necessities)’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필수재란 생필품처럼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재화를 말한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인문학이 필수재가 되면 사회적으로 큰 비용이 발생한다.

19세기 이전의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인문학이 공부의 모든 것이었다. 인문학이 필수재인 동시에 사치재였다. 두 나라 모두 과거(科擧)제도를 통해 최고의 인문학자들을 정부 관리로 선발했다. 역사학자들은 과거제가 유능한 인재를 두루 등용하도록 만든 훌륭한 제도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미국 조지메이슨대의 경제학자 고든 툴럭 교수는 과거제가 우리나라와 중국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다고 평가한다. 인문학은 정부 운용이나 생산 활동과는 거리가 먼 학문이다. 더 큰 문제는 수많은 인재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만큼이나 낮은 과거급제를 위해 비생산적 인문학 공부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생산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19세기가 되기까지 서구에서는 소수 귀족만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관직의 꿈을 접어야 했던 대부분의 인재는 상공업과 같은 생산 활동에 종사했다. 그들은 산업혁명을 위한 고급 인력의 기반이 됐다. 이에 비해 수많은 인재를 ‘공자왈 맹자왈’의 인문학 공부로 몰아넣었던 과거제는 우리나라와 중국 사회의 정체(停滯)를 불러왔다고 툴럭 교수는 설명한다.

관존민비(官尊民卑·관료는 높이고 국민은 낮게 보기) 의식에다 현대판 과거시험이라는 인식 때문에 광복 후에도 우수한 인재들이 고시(考試)에 많이 몰렸다. 하지만 고시공부는 과거공부처럼 정책 입안을 위한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낭비적 공부’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처럼 고시에 목을 매는 인적 자원의 낭비가 발생하지 않았던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산업화와 개방화 덕분이었다. 이공계와 경상계 교육을 받고 산업 현장이나 무역 현장으로 나가는 것이 고시 못잖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대학생들에게 ‘철(鐵)밥통’ 공무원과 법조인이 다시 매력적인 직업으로 다가왔다. 지금 ‘고시 폐인’이라 불리는 각종 고시 준비생이 20여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고시가 다시 조선시대의 과거처럼 엄청난 인적 자원의 낭비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과 더불어 이런 고시의 폐해는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를 가로막는 커다란 암초다.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는 상상력과 창의성,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경제 운용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과 시장,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이 설명과 그가 감명 받았다는 ‘창업국가(Start-Up Nation)’라는 책의 내용으로 미뤄볼 때 창조경제는 현재 잘나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벤치마킹하자는 것으로 짐작된다.

왜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공무원, 법조인, 의사보다 벤처 창업을 더 선호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창업을 하는 게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창업국가’를 추구하고 싶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창업 인센티브부터 제고해야 한다. 그러려면 다음 두 가지의 제도 개혁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첫째, 고시제도를 없애고 선진국처럼 민간 부문에서 경쟁력을 입증한 인재들을 공무원으로 선발해야 한다. 그리고 법조인의 공급을 대폭 늘려 그들의 기대수입을 크게 낮춰야 한다. 그래야 ‘고시 폐인’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고시의 매력이 사라져야 유능한 인재들이 이공계로 관심을 돌린다. 그런 면에서 박 대통령이 장차관의 4분의 3 가까이를 고시 출신들로 채운 것은 창조경제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창조경제 패러다임 아래에서조차 이공계나 민간 전문가가 대접을 못 받는다는 시그널을 보냈기 때문이다.

둘째, 대학에서 벤처 창업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와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정부의 예산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 기초과학 연구는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재지만 응용과학과는 달리 특허의 혜택이나 기업의 지원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대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의대 정원을 대폭 늘려 의사의 기대수입을 크게 낮춰야 한다.

박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통해 이스라엘과 같은 ‘창업국가’의 초석을 다져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튼튼한 경제를 바탕으로 사치재로서의 인문학에서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학
#창조경제#인문학#고시제도#과학기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