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화폐개혁’은 더이상 ‘설(說)’이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닥칠 현실인 거죠. 그래서 금을 사들이고 해외 투자방법을 알아보는 겁니다.” 한 증권회사의 이코노미스트는 요즘 한국 부유층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복지 확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려고 박근혜정부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이렇게 때 아닌 화폐개혁설까지 불러왔다. 화폐 개혁을 실행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지만 새 정부의 지하경제와의 전쟁 의지는 그에 못지않게 강력해 보인다.
국세청이 최근 발표한 기획 세무조사는 224명이란 대상자, 1000명에 육박하는 조사인력 모두 사상 최대다. 금융위원회도 금융정보분석원(FIU)이 보유한 금융거래 정보를 적극적으로 국세청에 제공해 탈세를 색출하는 데 협조할 계획이다. ‘제2의 세원(稅源)’이라 불리는 ‘납세자 심리’ 면에서 떳떳하지 못한 돈을 숨긴 이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한 강도다.
해외에서도 고액 자산가들을 불안하게 하는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가 있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최근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재산을 숨겨둔 세계 각국 부자 수천 명의 신상을 곧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인이 끼어 있는지 국세청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은 새 정부가 복지공약 실현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으로 제시했던 세출 구조조정, 비과세·감면 축소가 벽에 부닥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조원동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최근 “현재 있는 지출사업을 없애거나 중단하거나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느냐”라며 세출 구조조정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비과세·감면을 대폭 줄인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당장 최근 나온 주택시장 정상화 방안부터 양도소득세, 취득세를 크게 깎아주는 내용이 포함됐다. 더욱이 경기 침체로 세수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5년간 복지 확대에 필요한 135조 원을 마련하려면 정부로선 지하경제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정부 추산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0∼25%. 20%로만 봐도 지난해 기준 250조 원으로 삼성전자의 전 세계 매출(지난해 201조 원)을 능가한다. 규모만 본다면 복지 확대에 필요한 재원 정도는 쉽게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도 몇 가지 함정이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 십몇 년간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지하경제를 양성화한 나라다. 1999년 도입한 신용카드 소득공제, 2005년 세계 최초로 도입한 현금영수증 제도는 자영업자들의 소득 신고율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특히 노무현 정부 기간에는 통계에 잡히지 않던 지하경제가 GDP에 대거 편입되면서 성장률을 끌어올려 체감경기와 성장률의 괴리가 컸다. 정부 당국자들은 세금을 걷어 올릴 새로운 금맥을 찾아낸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실은 쉽게 파낼 수 있는 금은 모두 채굴한 노후 광맥인 셈이다.
그리스의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는 2006년에 갑자기 GDP가 25%나 늘었다. 유럽연합(EU)이 요구하는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을 맞추기 위해 술, 담배의 밀거래 등 지하경제 부문을 한꺼번에 GDP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통계상 GDP는 늘었지만 여기서 세금이 제대로 걷혔을 리 없다. 그 결과가 국가 파탄까지 치달았던 지난해 재정위기였다.
지하경제 양성화는 적극적이고 꾸준히 추진해야 할 올바른 정책이다. 하지만 당장 막대한 세금을 여기서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과도한 기대다. 더욱이 여기서 거둘 세금을 염두에 두고 복지를 확대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계란 하나가 생기자 “이 알이 닭으로 크면 계란을 많이 낳을 거고, 그걸 팔아 양을 사고, 양이 커서 새끼를 낳으면 소를 사고…” 하는 상상을 하다가 벌써 부자가 된 느낌에 달걀을 삶아 먹었다는 가난한 바보의 얘기가 생각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