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는 영국 총리 가운데 이름 다음에 ‘이즘(ism·대처리즘)’이 붙는 유일한 총리이다. 그가 내건 신자유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정책이다. 작은 정부, 공기업 민영화, 금융규제 철폐, 노동시장 유연화, 평등교육 타파, 복지개혁 등 시장 중시정책이다.
대처는 구조개혁에 성공한 정치가다. 정권을 잡자마자 예산을 줄여 작은 정부를 실현했고, 세금으로 보전되던 공기업을 민영화했으며 노동관련법 제정과 개정으로 노조파워를 무력화했다. 금융개혁에 성공했고, 친시장적 분배정책으로 ‘영국병’을 치유했다. 이를 지켜본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구조개혁은 대처 총리처럼 집권 첫 6개월 이내에 마쳐야 성공할 수 있다’라고 했다.
대처가 잘한 첫 번째 일은 기업이 다시 활동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처는 1992년 9월 서울을 방문해 연 인촌기념강연에서 “기업 활동이 국가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 활동은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국가가 시장의 역할을 박탈하지 않을 때 경제성장은 더욱 빠르고 훨씬 좋은 성과를 나타낸다”라고 말했다. 대처는 또 자신이 했던 구조개혁의 성공이 가능했던 비결에 대해 “꼭 한 단어, ‘기업’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라고 했다. 기업이 살면 경제가 산다는 것을 짚은 것이다.
대처는 또 당시 ‘민영화’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에서 3단계에 걸쳐 48개의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민영화된 공기업은 경쟁을 통해 생산성이 올랐고 일자리가 늘었다. 이에 따라 대처는 ‘영국을 공기업 민영화를 수출한 세계 최초의 국가로 만든 정치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지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은 공기업을 논공행상의 기념장소로 사용했다. 그런 점에서 새 정부가 방만한 공기업들을 어떻게 개혁할지 주목된다.
대처는 노조와도 과감히 싸웠다. 1970년대에 노조 천국으로 알려진 영국을 노동개혁을 통해 현재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노동시장이 유연한 나라가 되도록 기초를 닦았다. 한 예로, 대처는 재집권에 성공하자마자 1983년 6월 탄광 개혁을 추진했다. 제왕 같은 아서 스카길 노조위원장이 전국적인 석탄노조 파업으로 이에 맞섰다. 이에 질세라 대처는 석탄을 몰래 수입해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파업은 1984년 3월 6일에 시작해 이듬해 3월 3일까지 무려 363일 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스카길이 항복했다.
방만한 노조와 싸웠던 대처의 뚝심은 한국의 지도자들이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은 ‘경제자유’로 평가한 노동시장 유연성이 낮기로 2010년 144개국 가운데 126위다. 더 심각한 것은 2002년 김대중 정부 때 58위,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107위, 2010년 이명박 정부 때 126위로, 노동시장이 지속적으로 경직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노동시장이 경직되면 기업 활동이 둔화되고 해외직접투자 유입이 감소한다. 한국은 최근 3년 동안 해외직접투자 순유입(유입액-유출액)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1조4000억 달러 이상의 해외직접투자 유입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주요 2개국(G2)이 되었다.
대처가 잘한 것이 많지만 잘못한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말기에 저금리정책을 펴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그는 인촌기념관 강연에서 “저금리 정책은 잘못한 정책이었다”고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1인당 똑같은 인두세를 매김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 마지막 임기 후반 대처는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인두세 도입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저항이 거셌고 시위 진압과정에서 시민 1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대처는 결국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정계를 떠나야 했다.
대처가 숨을 거둔 영국은 슬픔에 잠겨 있다. 고인의 지난 삶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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