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전승훈]공포마케팅과 대중지성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1일 03시 00분


전승훈 문화부 차장
전승훈 문화부 차장
공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웬만한 겁주기로 통하지 않는다.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장사꾼들의 ‘공포 마케팅’에 시달린다. “수학 올인반, 죽을 때까지 시킵니다. 집에서는 잠만 재우십시오.”(학원 광고) “은퇴 후 최소 20억 원이 필요합니다.”(금융회사 직원)

영국 켄트대 사회학과 교수 프랭크 푸레디가 쓴 ‘공포정치’(이학사)는 현대사회가 어떻게 공포를 정치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이제 ‘공포정치’는 더이상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단두대 정치를 펼쳤던 로베스피에르나, 히틀러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좌파나 시민단체도 불안한 미래에 대한 극단적 시나리오를 통해 겁을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설파하려 한다. 지구온난화, 원전 공포, 석유 고갈, 먹거리 오염, 테러와의 전쟁, 통일비용, 연금 고갈, 금융시장 붕괴까지…. 21세기의 삶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핵실험,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폐쇄 등 연일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도 전 세계를 향한 ‘공포 마케팅’이다. 부시-이명박 정권 이후로 존재감을 철저히 무시당해 온 북한이 제발 나를 ‘장기판의 졸(卒)’로 보지 말라는 몸부림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쟁 위협 와중에도 철저히 실리를 챙겼는데, 아들 김정은은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 불안감을 더해준다.

그런데 요즘 한국인들은 조용하다. 주말이면 여느 때처럼 고속도로가 꽃구경 인파로 가득 찬다.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의 안보불감증이나 비현실적 낙관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내 생각엔 안보불감증보다는 ‘공포의 면역화’ 현상이 아닐까 싶다.

북한의 ‘불바다’ 발언도 수없이 반복돼 온 데다 이미 다른 공포에도 충분히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에 어느 나라인들 안전할까. 지구 반대편 작은 국가의 재정위기로 하루아침에 내가 직장에서 잘릴 수 있다는 공포가 상존하는 세상이다. 대지진과 쓰나미를 겪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주변 25km 지역에서 가족과 함께 2년간 살아 온 한 남성은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돌베개)란 책에서 “지구상에 더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며 대피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의 뇌는 상존하는 위험이지만 피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의도적 눈감기’를 한다. 늘 공포를 안고 살아갈 수는 없기에 생존을 위해 뇌가 선택하는 착각 본능이다. 전쟁위협 속에 생필품 사재기나, 주식시장 패닉 현상은 북한의 공포 장사꾼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요즘 한국인들이 침착한 이유는 각종 ‘공포 마케팅’의 허와 실을 꿰뚫어보기 시작한 한층 똑똑해진 대중 지성의 발현이라고 믿고 싶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북한#공포마케팅#핵실험#미사일 발사#개성공단 폐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