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푸들을 원한 대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2일 03시 00분


이기홍 사회부장
이기홍 사회부장
세상만사가 사필귀정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어떤 일이든 도모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邪)가 끼면 결국은 일이 어그러지고 혹독한 대가가 돌아오는 것 같다.

지난 수개월간 검찰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의 인과관계를 따져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Ⅰ막. 푸들을 원하다

지난해 말 성검사 파문 등의 수습과정에서 검찰총장과 중수부장이 정면충돌하면서 한상대 총장이 물러났다. 정권교체기에 새 총장을 정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새 총장은 만신창이가 된 검찰조직을 추스릴 수 있도록 내부 신망이 두텁고 검찰독립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어야한다는 여론 속에 채동욱 고검장, 김진태 대검차장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런데 의외의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안창호 헌재재판관이 유력하게 부상했다. 그는 대통령직 인수위 고위인사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검사였다는 사실과 별개로 재판관이 된지 4개월 밖에 안된 사람을 총장으로 민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이 사실이 동아일보 보도로 공개되면서 비난이 쏟아졌고 안창호 카드는 일단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어 급부상한 이름이 김학의 고검장이었다. 박근혜 당선인과의 친분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도 새 정권 실세들이 밀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정계에 두터운 인맥을 쌓아왔다. 위기에 처한 검찰조직을 추스릴 총장감으로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김학의 총장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특수수사로 잔뼈가 굵은, 무골 기질이 강한 김진태, 채동욱 대신 권력실세들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순치된 총장감'을 찾는다는 말이 파다하게 돌던 때였다.

Ⅱ막. 위대한 반란

2월 7일 검찰총장 후보 추천위가 사상 처음으로 열렸다. 3명 이상을 추천하면 법무부장관이 대통령에게 제청하는 제도다. 다들 안창호 김학의가 당연히 포함될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회의 벽두에 민간위원들이 무기명 비밀투표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추천위를 거수기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위원들의 단호한 요구를 법무부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비밀투표 결과 1차 투표에서 김진태 채동욱이 5표 이상을 얻었고 2차 투표에서는 소병철 고검장과 길태기 법무차관이 기준을 통과했는데 박빙의 승부 끝에 소 고검장이 선택됐다. 김학의 안창호 두 사람 모두 빠진 상태로 후보 3명이 확정된 것이다.

훗날 누군가 한국 검찰사를 쓴다면 이날 회의를 검찰 독립을 향한 위대한 혁명으로 기록할 것이라 필자는 믿는다. 정권 출범기의 검찰총장을 대통령이 낙점하지 못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총장 추천위 제도를 도입할때만해도 여야 어느쪽이든 자신들이 집권하면 추천위는 대충 콘트롤 할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도의 힘은 무서웠고 추천위원들의 사명감은 대단했다.

Ⅲ막. 미련을 못버린 '보이지 않는 손'…난파


추천위의 반란이후 법무부가 총장 임명제청을 하려해도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새로 출범할 정부의 공직자 인사 라인 일부 인사들은 추천위를 다시 소집하는 방안까지 검토했지만 동아일보에 이 사실이 보도됨으로써 더 이상은 '반혁명'을 꿈꾸지 못하게 됐다.

그러다 다시 이변이 발생했다. 3월 14일 김학의 고검장이 법무차관에 임명된 것이다. 아무도 예상못한 이례적 인사였다. '김학의 카드'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준 인사라는 평판이 나왔다. 차기 법무장관 임명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게 비극적 사태를 몰고 온 사단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과 사정당국은 이미 별장 동영상 의혹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학의 차관 임명이 없었다면 이 의혹은 그냥 묻혀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만해도 이 의혹은 고위공직자들과 건설업자가 구조적으로 유착한 권력형 비리 사건이라기 보다는 섹스스캔들 차원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관 인사로 동영상 의혹은 다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게 되었고, 결국은 청와대 민정라인과 검찰 모두에 씻기 힘든 상처를 준 사건으로 폭발했다. 김 전 차관 역시 억울한 피해자가 된 측면이 있다. 그가 만약 총장이 됐다해도 푸들역할만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단지 그런 기대를 품은 '보이지 않는 손'의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요즘 청와대 민정라인은 경찰이 차관인사전에 동영상 의혹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며 화를 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이 사전에 보고했든 아니든 그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집요하게 '푸들 총장'을 욕심낸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다.

박 대통령은 인사팀의 눈을 흐리게 만들어 새 정권에 상처를 입힌 그 음험한 손이 누구인지, 찾아내서 내쳐야 한다. 박 대통령이야말로 검찰이 칼을 겨눠도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푸들 총장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는 정치인 아닌가.

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검찰#총장 추천위#푸들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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