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그것에겐 흙바닥에 떨어진 미사보 끊어진 장미 묵주 냄새가 난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내 혀에서 떨어져 가루로 흩어져라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웠다는 기억 입속에서 잿빛 성체가 부서져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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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자국을 핥는 혓바닥, 지우개 흉터들의 감옥이자 숙성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이제 지우개가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다
화자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추악하고 고통스러워!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기억이 난다. 제 잘못은 아무리 무거운 거라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화자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화자는 예민하고,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다.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기억을 지운다는 건 그저 숨겨버린다는 게 아니라 참회한다는 의미도 있다.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지웠다는 기억!’ 화자가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으면, 그 속이 썩어 문드러졌으면, ‘잿빛 성체’가 가루가 됐을까. 죄의식의 고독이 절절히 전해진다. 화자처럼 나도 잊고 싶은 일이 있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다.
시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이제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게 돼버렸다. 폐쇄회로(CC)TV나 e메일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등에 우리의 행적이 기록되고 보존되고 심지어 유통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너무 놀라지 마시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뒤통수를 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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