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건 감사원장은 헌법학의 국내 최고 권위자다. 2년 전 감사원장 후보자 청문회 때 “학자적 양심과 신념을 걸고 독립성과 중립성을 감사원 최대의 가치로 여기겠다”고 한 발언에는 헌법 학자다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가 8일 기자 간담회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이런저런 견해가 있지만 국정운영 방향이 잘못되지 않는 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는 감사 운영이 잘못된 건 아니라고 본다”는 거다.
그러고는 ‘맞춤 감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날 새 정부 공약 이행 재원 마련에 관해 “세출구조조정과 세입증대를 두 축으로 대규모 감사를 실시 중”이라고 밝힌 데 이어 9일 ‘새 정부 국정운영 지원을 위해’ 5대 민생분야 5월 특별점검 보도자료를 내놨다. 10일엔 2001년의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까지 뒤져 증여세 부과 방침을 발표했다. 11일 입학사정관 감사 역시 대입간소화 정책을 위한 길 닦기라는 뒷담화가 나온다. 공공기관장은 국정철학이 같아야 한다는 대통령 발언 사흘 뒤 산업은행 비리 감사를 터뜨려 강만수 산은지주회장을 사퇴시켰던 거사의 연장선이다.
코드 맞추기 아닌 예정된 감사라는 감사원 주장도 일리는 있다. 사실일 경우 “국정운영 뒷받침 감사…”라는 말로 감사원의 신뢰를 흔든 양건에게 책임이 있다. ‘나불대는 촉새’를 경계하는 대통령도 부자연스럽지만, 그는 “대통령이 직접 (유임 통보) 전화를 했다”며 새 정부에 딱 맞춘 감사 계획까지 자랑하듯 털어놔 ‘촉새 감사원’을 만든 형국이다.
감사원 홈페이지엔 “감사원의 권한 또는 직무 범위는 함부로 침해하지 않도록 헌법에 그 설치 근거를 두고 있다”고 써있다. 감사원법 2조는 ‘감사원은 대통령에 소속하되 직무에 관하여는 독립의 지위를 가진다’고 했다. 헌법은 물론이고 감사원법 어디에도 감사원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따라야 한다는 대목은 없다.
감사원 감사가 추상같으려면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른 감사임을 강조해도 모자랄 판이다. 감사원장 스스로 임기보장과 독립성을 맞바꿨다는 천기누설을 한 셈이니 앞으로 어떤 감사가 나온들 국민이 신뢰할지 걱정이다. 대체 양건의 학자적 양심과 신념은 어디로 간 걸까.
머리를 싸맨 결과, 공직자의 양심과 신념은 권력에 따라 변한다는 슬픈 결론이 나왔다. 4자로 줄이면 염량세태(炎凉世態·세력이 있을 때는 아첨하며 따르고,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상인심)다. 다만 ‘배신 트라우마’가 있는 대통령이 염량세태를 끔찍이 싫어한다는 걸 알랑가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쯤, 그런 촉새인 줄은 몰랐다고 레이저 눈총을 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양건에게 권력기관장으로서 능력이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그는 2011년 국정감사에서 “측근비리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감사원이 할 일을 적극 강구하겠다”, 지난해 취임 1년 간담회에선 “감사원에 사정기능이 있으니 부패한 현실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러곤 넉 달 뒤 이명박(MB)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이 구속되기까지 뭘 했는지 궁금하다.
더구나 그는 MB정부 때 부패척결을 내걸고 국가청렴위원회 등 3개 기관을 합쳐 만든 국민권익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이었다. 취임 일성으로 “공직 부패 막아야 경제도 산다”고 소리를 높였다. 그 옆에서 신재민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뉘 집 개가 짖느냐는 양 뇌물을 받았다. 2009년 “집권 2년차의 부패를 조심해야 한다”고 양건이 말한 다음에도 강희락 당시 경찰청장은 ‘함바집 뇌물’ 수수로 물의를 일으켰을 정도다.
그럼에도 MB는 그를 감사원장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총선에서 낙마한 실세 이재오한테 권익위원장 자리를 비켜준 데 보은(報恩)하는 ‘의리’를 보였다. 양건도 대대적 대학 감사로 대학 구조조정 정책을 뒷받침했고, 올 초엔 ‘4대강 부실’을 발표함으로써 세력이 바뀌었음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4대강 부실이 완전히 고쳐진다면 이런 염량세태쯤이야 장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새롭게 도달한 기쁜 결론이 있다. 헌법학자로서 양건은 헌법에 보장된 4년 임기를 지키기 위해 감사원의 독립성을 버린 척, 허허실실 필살기의 연기를 한 것이다!
어차피 5년 단임제니 대통령의 레임덕은 시작됐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제야말로 염량세태의 진수를 보여줄 때다. 임기를 보장받은 이상 촉새 감사원은 잊고 박근혜정부의 핵심을 치열하게 감사하는 것만이 양건도 살고, 감사원도 살리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이 정부의 비극도 예방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특히 국정감사에서 “측근 기관장 임용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새 산은지주회장을 비롯해 향후 계속될 코드인사까지 물샐틈없이 감시해 마침내 지긋지긋한 부패 관행을 뿌리 뽑는다면, 양건은 임기와 독립성을 동반수호한 명감사원장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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