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6>죽산 조봉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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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당하더라도 조국을 사랑한다, 구명운동 말라”

간첩죄 등으로 검거된 죽산 조봉암(오른쪽)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환갑을 맞는 해인 1959년 7월 31일 사형에 처해져 8월 2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묘지에 안장됐다. 동아일보DB
간첩죄 등으로 검거된 죽산 조봉암(오른쪽)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환갑을 맞는 해인 1959년 7월 31일 사형에 처해져 8월 2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묘지에 안장됐다. 동아일보DB
죽산은 한국에서 ‘진보’라는 말을 처음 쓴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1899년 인천 강화에서 태어난 죽산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일제 때에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을 2년 수료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는 등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1946년 3월 조선공산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공산당과의 결별을 통보했다. 같은 해 6월 22일 인천 도림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미·소 공위 촉진시민대회’에서 “조선 민중은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 비(非)공산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서를 뿌리며 공개적인 전향 선언을 한다. 1955년엔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공산당과 절연(絶緣)했음을 천명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이듬해 3월 진보당 대표자회의를 통해 대통령 후보로 뽑히자 4월 13일자 동아일보에 ‘평화통일론’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정견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 이후 현실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동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법을 통해 한국은 단군 이래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소작제를 철폐했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도 분분하지만… 한국의 개혁이 대만과 함께 국제적으로 매우 드물게 성공한 사례라는 점에서 이승만 정부의 최대 치적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만약 (남한에서)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채 6·25를 맞았다면 점령군 북한에 대한 남한 농민들의 지지가 훨씬 적극적이었을 테고 전쟁은 북한의 조기 승리로 끝났을지 모른다. (이는) 미국 정부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장규 ‘대통령의 경제학’)

실제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2004년 8월 당시 중앙일보 이장규 대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브라질로서는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1월 19일 남미 순방 중 칠레 산티아고에서 가진 동포와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승만이 이끌던) 자유당 시대를 완전히 독재시대, 암흑시대, 어두컴컴한 시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토지개혁, 농지분배를 했다. 지나고 보면 정말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시 죽산 조봉암으로 돌아가자.

죽산은 1949년 2월 농림부 장관직을 사임했다가 1950년 5월 무소속으로 2대 총선에 당선되어 6월 국회부의장에 올랐지만 바로 6·25전쟁을 맞는다. 전쟁 중인 1952년 8월 2대 대통령선거에서는 80여만 표를 얻지만 3년 뒤인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이 얻은 500만 표의 절반에 가까운 216만 표나 얻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한다.

죽산은 이승만 정부가 지향하고 있었던 자유민주주의, 자유경제, 친(親)서구주의, 북진통일론에 대항해 ‘책임정치 수립, 수탈 없는 경제 실현, 평화통일 성취’를 내세웠다. 이승만 정부에는 정면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때 이승만을 도왔던 그였지만 어느덧 ‘실재하는 위협’이 된 것이다.

대가는 컸다. 그는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 전원과 함께 간첩죄 등의 혐의로 검거되어 이듬해 사형에 처해진다.

죽산은 마지막까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사형수로 형이 확정된 뒤 유일하게 접근이 허용된 김춘봉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판결은 잘됐어요. 무죄가 안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환갑이 다 된 사람이 징역을 살고 나면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정치란 다 그런 거지요.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 승리가 있는 거고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거지요. 정치를 하자면 그런 각오를 해야 해요.” (이원규 ‘조봉암 평전’)

사형 집행 전날 찾아온 진보당 관계자들에게는 이렇게 유언한다.

“내가 비록 법에 의해 죽음의 몸이 되었다 해도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절대 내 구명운동 같은 것은 하지 마세요. 길 가던 사람도 차에 치여 죽고, 자다가도 죽는 사람이 있는데 상심하지 마세요.”

죽산은 망우리에 묻혔으나 한동안 비석도 세우지 못하고 매년 기일에는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사를 지내야 했다. ‘간첩의 자식’이 된 자녀들의 고통도 컸다.

‘외아들은…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외부가 네 군데 말뚝 박히고 새끼줄이 쳐져 직방형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새끼줄 밖에는 경찰관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간첩으로 처형된 자의 집’이라 하여 경찰이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은 것이었다.’(‘조봉암 평전’)

망자(亡者)와 가족의 한이 풀린 것은 처형 52년 만이었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죽산이 받았던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리며 이렇게 판결했다.

“조봉암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건국에 참여했고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우리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됐다. 재심 판결로 잘못을 바로잡는다.”

그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이승만을 위협했던 최대 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진보’라는 말도 너무 흔해졌지만 죽산은 말과 행동이 다른 요즘 진보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가치(공산주의)가 틀렸다고 생각했을 때 과감하게 ‘전향’을 선언했다.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던 점에서 진정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현실 정치를 부정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직접 뛰어들어 큰 업적을 냈으며 대안세력으로서의 실험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개혁적이었다. 그리고 억울한 죽음 앞에서도 삶을 구걸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 ‘입 진보’ ‘생계형 진보’ 또는 ‘종북’으로 종종 비난을 받는 중이다. 조봉암 선생의 삶이 이 시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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