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은 업무상 횡령과 배임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3년과 벌금 51억 원을 선고했다. 올해 1월 병세 악화를 이유로 구속 집행이 정지된 김 회장은 어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구급차를 타고 법정에 출석했다. 법원은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 등을 참작해 원심보다 형량을 1년 깎아주긴 했지만 과거처럼 집행유예 같은 관용을 베풀지는 않았다. 기업 총수의 경제범죄를 엄단하겠다는 무(無)관용 원칙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김 회장 측은 “구조조정 등은 총수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적법한 경영 판단에 따라 이뤄졌다”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듯이 구조조정이 성공했다고 해도 이미 발생한 불법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적법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부실한 위장 계열사를 대규모로 지원했다면 배임에 해당한다는 논리다. 대기업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총수가 실질적인 경영자인 만큼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기업 총수들은 비자금 조성, 탈세 등과 같은 비리 혐의로 재판을 받아도 국가경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09년 도입한 새 양형 기준에 따라 기업 총수의 경영 공백 우려나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집행유예를 위한 참작 사유가 되지 못한다.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에 대해 1심이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한 것이나, 국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된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에게 검찰 구형보다 높은 벌금이 선고된 것도 달라진 기류를 보여준다.
우리 대기업들은 기업 총수를 중심으로 경영 체제를 수직 계열화해 세계가 부러워하는 성과를 냈다. 총수 중심의 경영은 단기 실적이나 배당에 연연하지 않고 중장기 투자를 하면서 신속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단기간에 덩치를 불리는 과정에서 총수 개인에게 집중된 권한이 경영의 투명성을 떨어뜨리고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법 대물림의 부작용을 불렀다. 한국식 경영이 갖고 있는 강점은 살리되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의사결정 방식을 바로잡아 기업 경영을 선진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무리한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할 정도로 최근 경제민주화 논의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기업과 기업 총수의 일탈과 불법은 바로잡아야 마땅하지만 여론을 의식한 일방적 대기업 때리기는 득보다 실이 많다. 대기업과 기업 총수가 자발적으로 개혁에 동참하도록 수위를 조절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정치권과 사법부는 경제민주화의 원칙을 바로 세우고, 기업은 준법과 윤리경영의 기본을 가다듬어 한국 자본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