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춘들도 아프다고 아우성이지만 1960년대 청춘들은 더했다. 늘 돈이 없어 끼니를 굶을 때도 많았다.
김지하도 대학교 때 ‘거지’였다고 한다. 집에서 돈이 오지 않을 때, 술은 마시고 싶은데 물주가 없을 때 마음씨 좋고 여유가 있어 보이는 친구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캠퍼스엔 이런 거지(?)들이 흔했다. 김지하의 2년 후배인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서울대 정치학과 61학번) 말이다.
“‘대학다방’과 ‘학림다방’이 우리의 쉼터였다. 찻값이 없으면 엽차를 홀짝거리면 그만이었다. 계란 노른자를 퐁당 넣은 ‘모닝 커피’나 홍차에 ‘도라지 위스키’ 몇 방울을 떨어뜨린 이른바 ‘위티(위스키 티)’를 시킬 때가 드물게 있었는데 호주머니가 넉넉해져 뭔가 폼 잡을 일이 생겼을 때였다. 문리대와 성균관대 사이에 있던 ‘명륜시장’에는 펄펄 끓는 맹물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고 참기름 한 방울과 간장으로 간을 한 ‘엉터리 수제비’를 팔았다.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다. 종로6가엔 동대문극장이 있었는데 ‘꿀꿀이죽’(미군들이 먹다 버린 찌꺼기들을 모아 끓여낸 잡탕 죽)을 팔았다. 단돈 10환이면 철철 넘게 한 그릇을 주는데 미군들 잇자국이 난 소시지도 맛있는 먹을거리였다. 가끔 담배꽁초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과 사무실 앞 게시판에 집에서 하숙비를 보냈다는 등기 우편이 왔다는 방이 붙으면 그날은 그 친구를 앞세워 술과 밥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하루는 자취하는 친구가 저녁을 해 준다길래 갔더니 반찬이 ‘샘표 간장’ 하나였다. 당시 우리는 벽에다 군대, 취직, 결혼 이렇게 걱정거리를 써놓고 한숨 쉬고 앉아 있다가 시골에서 돈 올라오면 우르르 몰려가 술 먹고 그랬다.”
그래도 부모들은 기를 쓰고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 소 팔고 논 팔아 대학에 보내다 보니 대학을 소뼈로 만든 것이라 해 ‘우골탑’이란 말도 유행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해봐야 갈 곳이 없었다. 기업이 없었으니 기껏 은행이나 전매청 등 몇 안 되는 국영기업이 전부였다. 대졸 후 취직이 결정된 사람이 10%가 채 안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경제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 고등실업자들이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해외 투자자들이 “다른 후진국에서는 공장을 지을 때 대졸 기술자가 없어 애를 먹는데 한국엔 좋은 기술자가 넘친다. 매우 우수해서 설계도만 주면 알아서 한다”고 만족스러워했다.
김지하는 취직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다. 서울대 미학과가 문리대로 편입되면서 김지하와 어울리게 된 송 이사장은 신입생 시절 김지하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때 우리 옷차림이란 게 남대문시장에서 산 검정 물 들인 군복에 검은색 군화였는데 김지하는 달랐다. 넥타이를 매고 반짝반짝 빨간 구두를 신고 연극한다고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우리 눈에는 영락없는 부르주아에 날라리였다(웃음). 그러던 사람이 문리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급기야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시작된 1964년엔 맹렬한 투사로 변신하고 박정희 독재 타도의 정신적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된다.”
김지하도 “만약 미학과가 문리대로 편입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다시 송 이사장의 회고다.
“서울대가 1975년 2월 동숭동에서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기기 전까지, 문리과대학(文理科大學)에 속하는 인문대와 사회과학대는 문리대라는 하나의 단과대로 묶였었다. 나 같은 정치학과생들도 20학점 이상의 외국어 과목을 이수해야 졸업이 되었으니 문리대 체제에서는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통섭’과 ‘융합’이 가능했다. 나도 정치학도이긴 했지만 눈동냥 귀동냥으로 문사철(文史哲) 지식을 얻어들었다. 전공에 상관없이 어울려 토론하고 뒹굴었다. 다른 학과 학생과도 잘 어울렸고 한두 해 학번 차이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불문과에 다니던 김승옥(소설가)이나 하길종(영화감독), 미학과에 다니던 김지하와 어울릴 수가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김지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문리대 시절엔 저마다 개성이 다른 온갖 낭만주의자들이 붐볐다. 서로 목청 높여 떠들어대는 토론으로 밤낮이 시끄러웠다. 마르크스 레닌에서부터 동학 창시자 최제우, 실학자 최한기는 물론이요, 단군 석가 공자 노자 장자 예수까지, 또 시인 정지용에서부터 김기림 서정주 임화, 그뿐인가, 마티스·피카소 샹송 재즈 민요·판소리·무가(巫歌)와 정악(正樂)까지 없는 게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은 바로 친구들이었다. 대학교 때 친구들과의 토론이 나를 지적으로 가장 성장시켰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고등학교 때에는 입시교육에 찌들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취업준비로 바쁜 요즘 젊은이들에 비하면 그때는 가난했지만 대학 다닐 맛이 나던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지하는 휴학과 재등록을 반복하며 대학을 다니는 바람에 입학한 지 7년 반 만에 졸업한다.
“1959년 입학하고 1966년 가을에 졸업했다. 그때 학칙에 따르면 총 재학기간 8년까지는 재입학이 가능했고 복학도 가능했다. 꼭 학교를 오래 다녀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등록했다 안 했다 그랬다. 휴학을 하고 밖으로 돌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등록하고, 등록 안 하고도 한 학기 계속 수강한 적도 있고.”
대학을 다니면서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거나 술집에서, 밥집에서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는 게 일상이었던 그가 자칫(?) 당시 대학가에 불어닥친 통일운동의 리더가 될 뻔한 일이 생긴다. 절친 조동일(74·문학평론가·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의 제안 때문이었다. 조동일은 불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국문과에 학사 편입할 정도로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김지하는 “조 형은 ‘우리문화연구회’를 비롯해 나를 민요, 무속, 판소리, 탈춤의 세계로, 민족과 민중의 전통예술과 문화의 큰 바다로 이끈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그가 ‘곧 있을 판문점 남북 학생회담에 민족예술과 민족미학 분야에서 나와 함께 남한 학생 대표로 참가하자’고 하는 게 아닌가. 북한에서는 김일성대학에서 역시 두 사람이 나온다면서 의제는 ‘민족예술 및 미의식의 역사적 발견과 외래 식민주의적 예술미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승낙했다. 조직이 아닌 개인이 참가하는 것이라는 게 맘에 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1961년 5월 15일이었다. 바로 다음 날 한국 현대사는 물론이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대사건이 일어날 줄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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