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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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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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어릴 적 한 번쯤은 ‘엄마가 갑자기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며 잠들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상실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한 번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한다.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지만, 막상 지금 이 순간 내 주위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눈시울부터 뜨거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게 되는 상실의 경험에 마주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실조차 믿지 못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화가 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무력감이나 죄책감 때문에 한없이 나 자신을 자책하기도 한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엷어지지만 꽤 오랫동안, 어쩌면 살면서 평생 때때로 뜻하지 않게 다시 엄습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에, 혹은 그 사람과 함께했던 장소에서, 혹은 그 사람이 좋아하던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될 때, 생각지도 않은 순간 불쑥불쑥 슬픔이 북받쳐 오르게 된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사려 깊고 헌신적인 삶의 동반자이자 훌륭한 정치적 조언자였던 남편 앨버트 공(1819∼1861)이 42세에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사망하자 깊은 비탄에 빠지고 말았다. 여왕은 이후 죽는 날까지 약 40년 동안 검은 옷만을 입었으며, 매일 앨버트 공의 방에 세안용 물을 가져다 놓게 하고 그가 입던 옷을 펼쳐 놓으며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그녀는 몇 년간은 대중 앞에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민의 지지도도 당연히 떨어졌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와도 사이가 틀어졌다. 앨버트 공이 죽기 전, 여배우와 추문이 돌던 아들을 만나러 갔었는데 2주 후 급환으로 앨버트 공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여왕은 남편의 죽음을 맏아들 탓으로 돌리고 원망했다. 당시 맏딸 빅토리아 공주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들을 볼 때마다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적기도 했다.

슬픔과 애도의 과정은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몇 년 정도 지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슬픔이 우울증으로 발전할 때도 있다. 이런 경우 죽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삼일장(三日葬)과 오일장(五日葬) 같은 전통적 장례의식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떠나간 자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주는 것이다. 이들의 심리적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하는 오랜 지혜의 산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이 생겨난 이유는 죽음은 예방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에, 오히려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장례 절차의 이러한 치유의 역할은 점점 희미해지고 많은 부분이 형식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바쁜 일상 속에 지인의 혹은 지인 가족의 장례에 참석하는 것이 부담처럼 느껴져서 인사치레로 참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가진 유족들도, 바쁘게 살고 있는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지기도 한다. 이제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로지 개인의 몫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이런 시대적 변화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에게도 새로운 논쟁거리를 던졌다. 현재 의사들이 참조하는 ‘정신질환 진단통계편람’에는 “상실 이후의 우울감은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는 한 우울증으로 진단하지 않는다. 치료보다는 관찰을 한다”고 권고한다.

하지만 5월에 나오는 개정판에는 ‘애도 과정 중 생기는 우울증에 대해서도 다른 우울증처럼 적극적으로 치료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어쩌면 더이상 슬픔과 애도의 치유에 친지, 이웃, 친구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고, 개인이 스스로 극복해야 하거나 혹은 개인이 전문가에게 도움을 의뢰해야 하는, 약간은 삭막한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삶은 더이상 이전의 삶과는 같을 순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비슷한 경험을 먼저 했던 이웃이나,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 또는 망자(亡者)를 같이 아끼고 사랑했던 친지의 도움과 위로는 그 무엇보다 큰 치유의 힘이 될 것이다.

마음 놓고 슬퍼하지도 못하도록 바쁘게,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가 우리가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자연스러운 치유의 힘마저 점점 약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이별#상실#우울증#슬픔과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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