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의 등번호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LA 다저스의 류현진 선수는 한화 시절과 마찬가지로 99번을 선택했다. 한화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던 1999년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그 자신은 “99번의 꽉 찬 느낌이 좋아서”라고 말했다.
4월 6일(현지 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와 레반테의 경기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시축자로 나섰다. 반 총장이 가슴엔 유엔 로고, 등에는 1000이라는 숫자를 새긴 흰색 티셔츠를 입고 나와 힘차게 공을 차자 관객들은 “와” 하는 함성으로 화답했다. 그런데 정작 등번호 1000의 의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당시 마드리드에 머물고 있던 기자는 시축 행사 다음 날 반 총장에게서 직접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어제(6일)가 제게 참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유엔이 정한 ‘새천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MDGs)’의 달성을 약속한 2015년 12월 31일까지 딱 1000일 남은 날이었으니까요. 새천년 개발 목표에 대한 전 세계인의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시축을 한 것입니다.”
‘새천년 개발 목표’란 유엔이 2000년 채택한 의제로,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을 반으로 줄이고자 마련된 8가지 개발 목표를 가리킨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절대빈곤과 기아 퇴치, 보편적 초등교육의 달성, 양성 평등 및 여성 능력 고양, 유아 사망률 감소, 모성 보건 증진, 에이즈 등 질병 퇴치, 지속 가능한 환경 보장, 개발을 위한 국제협력 구축 등 8개 분야에 걸쳐 다양한 실천 계획이 마련돼 있다. 반 총장은 시축 직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며 영문 그대로 옮겨 주었다.
“I’m here to kick off one thousand days of action for MDGs. Together we can kick out poverty and scored goals for the world.”
해석하자면 “나는 새천년 개발 목표 시행 1000일을 시작하러 여기에 왔다. 우리가 함께라면 세계를 위해 가난을 걷어차고 골을 넣을 수 있다”가 된다. 반 총장은 일부러 ‘kick off one thousand days’와 ‘kick out poverty’로 운을 맞춰 듣기 좋고 기억하기 좋게 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빈곤 퇴치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사실 전 세계 빈곤 퇴치를 이끌 수장으로 반 총장만 한 적임자도 없다는 평이다. 그는 세계 어디를 가든 연설 때마다 “십 리를 걸어 학교를 다녔고, 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 식량으로 살아온 가난한 한국 소년”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런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경제대국이 됐다는 것 자체가 절대빈곤 상태인 국가들에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빈곤 퇴치를 위해 한국에서 가장 배워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2월 25일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때 반 총장을 대신해 참석한 얀 엘리아손 유엔 사무부총장은 취임식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을 접견하며 새마을운동 이야기를 꺼낼 예정이었으나 박 대통령이 먼저 “새마을운동을 통해 세계 빈곤 퇴치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에 앞서 엘리아손 부총장은 김관용 경북지사를 만나 지구촌 빈곤 퇴치를 위한 새마을운동의 세계화 방법을 협의하기도 했다.
최근 한 시민단체가 유신독재의 상징인 새마을기가 아직도 관공서에 게양된 것은 시대착오라고 지적해 논란이 일었다. 서울시는 이미 1995년부터 모든 관공서의 새마을기 게양을 중단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유신의 상징’ ‘시대착오’로 여겨지는 새마을운동이 유엔의 빈곤 퇴치 프로젝트와 함께 세계무대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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