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금’이라고 배웠다. 말보다 행동, 실천력을 강조한 이 금언. 화려한 수사가 속빈 강정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당연한 태도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침묵이 해악일 경우도 많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침묵 때문에 폐습이 정당화된다면 그 침묵은 당연히 깨져야 하지 않을지. 회피이며 자기기만이어서다. 그러자면 용기도 필요하다. 이 실험은 미국의 한 자폐아 사이트가 공공장소에 노출된 자폐아의 돌출행동에 대해 공중의 인식이 어떤지를 보여준다. 정당한 공분(公憤)이 침묵보다 위대함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여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그곳은 뉴저지 주의 한 식당. 실험자는 연기자를 손님으로 가장시켜 두 테이블에 배치했다. 중앙엔 자폐아 가족을, 그리고 주변에 한 남자를 앉혔다. 자폐아의 특징적 행동이라면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 자폐아는 식사 도중 큰 소리로 ‘계란’을 연호하며 유리잔의 음료수도 쏟고 식당 안을 돌아다녔다. 이 소란으로 식당 손님들이 자폐아가정임을 눈치 챈 건 당연. 이미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이도 보였다. 그즈음 연기자로 배치된 남자가 그런 불편한 심기의 손님을 대변하듯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여기는 공공장소이니 나 같으면 아이를 데리고 식당을 나가겠다고.
가족은 연신 사과하며 아이가 자폐증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남자의 노기는 누그러들 줄 몰랐다. 그때 좀 전부터 뭔가 말하려는 듯 머뭇거리던 남자손님(실제 손님)이 그 불평남을 향해 일갈했다. “입 닥치고 네 식사나 하라”는. 이 말에 ‘그만하고 나가 주었으면’ 하는 쪽으로 대세가 형성되는 듯 보이던 식당분위기가 일순 반전했다. 다른 테이블의 한 여성(손님)도 아이 엄마에게 다가가 어깨를 안아주고 “당신들이 나갈 이유가 없다”며 위로한다. 그러자 표정 없이 수수방관하던 손님―침묵의 다수―까지 그 불평남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며 고함친다. “지금 여길 망치는 건 아이가 아니라 당신이니 그냥 밥이나 먹고 조용히 떠나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격. 불평남은 대세에 밀려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러자 식당 안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불의에 대한 승리, 공분을 통해 정의를 일으켜 세운 손님 스스로가 자신의 용기에 감격해 스스로에게 보내는 격려의 박수였다.
나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연전 장거리비행의 기내에서 좌석등받이를 젖히고 잠을 청하다가 뒷좌석 승객으로부터 등받이를 발길질 당한 것을 소재삼아 쓴 ‘여행에티켓, 국격’이란 칼럼과 관련해서다. 이날 칼럼엔 누리꾼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는데 그게 나를 실색하게 했다. 놀랍게도 당해도 싸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것인데 더 황당했던 것은 직업외교관 경력이 30년 이상이라는 중년남자의 전화였다. 자기는 평생 한 번도 좌석을 뒤로 젖힌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뒷좌석 승객이 불편할까봐.
남을 위해 불편을 참는 것.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내 좌석등받이’에 국한해서만큼은 묻고 싶다. 몸을 접다시피 쪼그리고 앉아 십여 시간을 버텨야 하는 장거리노선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에서도 과연 그런 양보와 배려의 미덕이 기대되느냐는 것이다. ‘기내’라는 특수한 공간이 인체에 얼마나 열악한 환경인지, 좌석등받이가 이코노미증후군―폐부종으로 인한 기내 혹은 착륙 후 돌연사―예방을 위한 지극히 최소한의 안전 설비란 걸 안다면 더더욱. 그런 점에서 그 견해는 옳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황당한 사건도 그날 오후 바로잡혔다. 이런 뜬금없는 반응에 공분한 누리꾼들이 적극적으로 올린 역댓글 덕분이다. 만약 그날 이런 공분 없이 황당무계한 댓글이 난무했다면 글쎄….
이렇듯 공분으로 바로잡아야 할 뒤틀린 현실은 도처에 산재한다.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만큼 밀착해 선 비좁은 승강기 안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무심함, 한창 상영 중인 영화관에서 느닷없이 스마트폰을 켜 그 불빛으로 관람을 방해하거나 문자송신과 통화를 해대는 경솔함, 상쾌해야 할 아침 출근길에 맡는 담배연기와 길바닥을 외면하게 하는 가래침 주인공들의 폭력에 가까운 습관적 행동…. 이런 걸 바로잡자면 침묵해선 안 된다. 모두 함께 공분해야 한다. 그게 시민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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