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의 ‘100세 시대’]자식에 대한 ‘짝사랑’도 지나치면 우울증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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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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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지난해 봄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살고 있는 75세의 B 씨는 지난해 12월 마지막 날, 집으로 오시라는 딸 전화를 받았다. B 씨는 이런 날 혼자 지내지 않도록 신경 써주는 딸이 고마웠다. 사위와 손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새해 아침에 떡국도 함께 끓여 먹을 요량으로 먹을거리를 잔뜩 준비해 갔다. 그런데 B 씨가 부엌에 떡을 내려놓자마자 딸이 말했다. “엄마 우리도 떡 있어. 그건 내일 아침에 혼자 끓여 드세요.”

딸은 끝내 “주무시고 가시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B 씨는 그날 밤 혼자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섭섭하고 외로워 눈물이 났다. ‘아버지도 안 계신데 오늘 같은 날 혼자 보내지 말고 여기서 같이 지내요’라고 말해주길 바랐는데, 자신을 내쫓다시피 한 딸이 야속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돈 꿔달라며 속 썩이는 아들 문제를 의논하고 싶었던 B 씨는 딸이 가르쳐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딸과 사위, 손자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딸이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유. 놀라라. 엄마, 미리 전화하고 오셔야지, 이렇게 갑자기 불쑥 찾아오면 어떻게 해? 벨이라도 누르시든지.” B 씨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딸이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싶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비슷한 일이 몇 번 있고부터 B 씨는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큰 병이 걸렸나 해서 병원의 진단을 받아보면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여기저기 아팠다. 게다가 평소 대범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집에 혼자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B 씨는 이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며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킨 B 씨였다. 씩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고, 자식들한테 기댈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야, 너희들이 뭘 알아? 부모 맘을 알아?” 하면서 소리 치곤 말았을 일도 이제는 일일이 가슴에 담아두게 된다. 초라하고 외롭게 늙어가는 자신이 가엾어서 눈물이 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07∼2011년 건강보험 진료비 지급 자료를 분석한 결과 노인들의 우울증이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70대 여성은 인구 10만 명당 4178명으로 가장 많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70대 다음으로는 60대 여성(3217명), 80세 이상 여성(2990명) 순으로 우울증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우울증 진료환자가 증가해 2007년 47만6000명에서 2011년 53만5000명으로 늘었는데, 특히 80세 이상 여성은 5년 동안 연평균 8.2% 증가했다. 이어 80세 이상 남성(6.8%), 70대 여성(5.2%), 20대 남성(5.1%) 순으로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70, 80대의 우울증이 이토록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르신들을 직접 만나본 경험에 의하면 자녀와의 갈등이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남 앞에서 드러내 말하지 않을 뿐이다.

남자 어르신도 다르지 않다. 며칠 전 만났던 76세의 K 씨는 아내가 사망한 후 수면장애와 백내장 증세가 심해졌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검사 결과 우울증과 스트레스 또한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몸 아픈 얘기만 하던 K 씨는 몇 번의 상담 끝에 고민을 털어놨다. 그동안 소원했던 자식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딸 생일에 떡케이크를 보냈더니, 이 소식을 듣고 그나마 연락하고 지내는 작은아들에게서 “갑자기 무슨 꿍꿍이냐?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라는 반응이 왔다고 한다. K 씨는 부질없는 짓을 한 자신이 부끄럽고 처와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노인의 우울증이나 자살이 자녀와의 갈등에 연유한다는 건 일본에서는 2000년대 초반 검증된 사실이다. 김동선의 저서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을 보면 노인의 자살률이 가장 높았던 일본 아키타 현의 노인 자살 원인이 가족, 특히 자녀와의 갈등에 있다는 놀라운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가족과 동거하는 노인의 자살률이 그렇지 않은 노인의 자살률보다 더 높았으며, 홀몸 노인보다 가족 동거 노인의 우울 정도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자녀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자식들은 입으로는 부모의 희생과 배려를 강조하지만 적대감을 행동으로 표시한다는 것. 스트레스에 대한 대응능력이 부족한 노인들은 자식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상처 받고 삶의 의지마저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노인들은 ‘오래 살아서 가족에게 폐나 끼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며, 분노나 공격성을 자녀에게 향하지 않으려는 자제심이 우울증과 자살로 이어진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노년에 우울하지 않으려면 자식에게 ‘쿨’할 수 있어야 한다. ‘쿨’하다는 건 자식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기대지 않는다고 해서 쿨한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심리적으로도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쿨한 것이다.

자식에 대한 ‘짝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자식#기대#우울증#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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