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93>리미티드 에디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9일 03시 00분


리미티드 에디션
―김박은경(1965∼ )

통화 중인 명품 실리콘이다 출렁거리는 마놀로 블라닉이다 빛나는 샤넬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임계까지 보톡스다 거꾸로 달려가는 여우다 춤추는 노란 머리 레게 스타일이다 피어싱한 입술의 코카콜라다 속성 발효 중인 근육 속으로 팡팡 터지는 힘줄들이다 권총과 해골의 타투다 금발의 늑대 본좌다 동물적 본능의 타이밍이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야릇하게 흔들리는 길고 흰 꼬리, 손가락을 들어 프리덤을 우주로 날려주는 웨스트사이드 힙합 센스다 하나 둘 하나 잽싸게 구르는 지구다 변종의 히어로, 발톱과 발성의 발정이다 무국적의 혼종이다 오, 마이 허니 러버 그렇고 그렇지 백미처럼 흰 토끼새끼다 토끼똥처럼 발사하는 붉은 눈알들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신상 해골들이다 얽히고설킨 꼬리들이다 놀라 떨어뜨리는 신형 폰이다 나뒹굴어 쪼개지는 세계적인 사과 반쪽이다 베어 물기도 전에 닳고 닳은 에디션, 여우와 늑대가 만나 토끼를 낳다니 평화로운 비둘기 가족이라니 다 함께 붉은 발을 들어 중얼중얼, 구구(求求)다

맹렬히 가동되고 연계되는 공장과 시장의 에너지가 앵앵거리고 웅웅거린다. 리미티드 에디션, 한정판 최고급품을 대중적으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젊음의 현장이다. 30대 여성이라면 하나쯤 갖고 있고, 20대 여성이라면 갖고 있지는 않아도 기본으로 알아야 대화에 낄 수 있다는 리미티드 에디션. 그런 걸 걸치고 노란 레게머리에 피어싱에 타투를 하고, 한 손에는 신형 폰, 코카콜라를 마시며 테크노 음악에 맞춰 웨스트사이드 힙합을 춘다. 이쯤 살아야 젊음이라고, 물질이 빈약한 젊음은 젊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 소유냐 존재냐, 소비냐 존재냐. 소유하고 소비하는 게 존재다! 그들을 향해 토끼가 토끼똥을 발사하듯 신상(新商)이 쏟아진다. ‘베어 물기도 전에 닳고 닳은 에디션!’ 이 속에서 젊음의 대중문화가 춤추고 자란다. 이렇게 제 모든 게 물건에 잡혀 있는 여우와 늑대가 만나 토끼 같은 자식을 낳는다고? 비둘기처럼 다정한 가정을 이룬다고? 중얼중얼, 래퍼가 읊조리듯이 조롱하는 문장들이 흥겨운 리듬을 타고 쏟아진다. 젊은이들의 소비문화에 대한 성찰을 담아.

흔히 7080세대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통기타와 청바지와 생맥주를 든다. 젊은이들이 유행하는 물건에 약한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들에겐 ‘센티멘탈’이 있었다. 하급 정서로 취급되기도 하는 센티멘탈이 그리운 시절이다. 돈 없이도 포근히 빠질 수 있었던 젊은 날의 센티멘탈.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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