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의 비밀’은 한국 드라마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너무나 미국적인 공상과학(SF) 영화 시리즈 ‘스타워즈’에서도 최고의 반전은 악역인 다스 베이더가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임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전투의 대의명분이 바뀐 것도 없고 상대의 말이 검증된 것도 아닌데, 주인공은 “내가 네 아비다”라는 대사에 일순 전의를 상실한다.
▷최근에 리메이크로도 제작된 SF 영화 ‘토탈 리콜’에서는 스스로를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알았던 주인공 더글러스 퀘이드가 그것이 조작된 기억이며, 자신이 실은 정부의 이중첩자임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영화의 원작자 필립 K 딕은 기억이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본 것 같다. 그가 자주 이용한 ‘나라는 사람이 내가 믿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반전’은 독자의 마음에 스멀거리는 두려움을 준다. 현재라는 순간에 뚝 떨어진 사람은 없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문제는 나는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으며,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와 같은 질문과 밀접하게 엮여 있다. 국가와 민족 같은 집단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항해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은 ‘건국의 예언자 이승만’이라는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리기로 했다. 학자들 간의 토론이라기보다는 한국 현대사를 잘 모르는 영상 세대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여론전에 가깝다. 한국 현대사에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할 것인가, 감동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두 영상의 후원자들은 영상 세대가 어느 편을 택하느냐에 따라 현실 정치의 구도도 조금은 달라질 거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딕의 소설과는 달리 기억이 전부는 아니다. 스카이워커는 제국군으로 전향하지 않고 퀘이드도 레지스탕스로서 살기로 결심한다.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만큼이나 어떤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지금의 선택도 중요하다. 역사를 무시하라는 주문이 아니다. 복잡한 팩트를 꼼꼼히 검증할 시간이 없다면 어떤 여론전에도 흔들리지 않을 중심을 갖췄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발을 헛디디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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