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와 전국 광역시도의 서민금융종합지원센터, 국민은행과 농협은행, 신용회복위원회 지점에서 일제히 문을 연 국민행복기금 가접수 창구가 북새통을 이뤘다. 은행과 카드회사, 저축은행, 대부업체 등 여러 곳에 빚을 진 저소득 다중(多重)채무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국민행복기금을 설치하겠다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1호 공약이다.
국민행복기금이 장기 연체채권의 원리금을 일부 탕감해주고, 남은 돈도 오래 나눠서 갚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존 신용회복기금과 비슷하다. 하지만 신용회복기금이 일부 금융사가 회수를 거의 포기한 채권을 그때그때 건건이 매입했다면 국민행복기금은 대부분의 금융회사가 갖고 있는 연체채권을 일괄 매입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감면 폭도 신용회복기금의 경우 빚의 30%가 최대였지만 국민행복기금은 30∼50%,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70%까지 해주는 등 채무자의 입장에서 보면 조건이 좋다. 채무자가 몰리게 돼있다.
현재 가계 빚은 국내총생산(GDP)의 86%인 1000조 원 규모로 국민경제를 위협하는 최대 복병이다. 국가적 구제가 필요한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탕감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일으켜 금융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 어제 일부 신청자들은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 내가 망했으니 50%가 아니라 다 깎아줘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민금융 정책도 진화가 필요하다. 어제 접수 첫날의 상황을 보러 캠코를 찾은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신용회복 없이 자금만 대주는 것은 부채 연장에 불과하다. 상환 능력 확충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활(自活)을 통한 신용회복을 끌어내지 못하면 정책자금을 아무리 퍼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국가 재정도 버틸 수 없다.
이번에 지원을 받은 사람이 남은 빚을 약속대로 갚지 않으면 탕감을 무효화하고 연체 이자에 법적 비용까지 받아낸다. 이들이 다시 국민행복기금을 신청할 경우에는 좀더 불리한 조건으로 1회에 한해 받아준다. 이런 일이 없도록 탕감 심사에서 뼈를 깎는 자구책을 요구하고 사후관리도 철저히 해야 한다.
국민행복기금은 ‘양날의 칼’이다. 힘들게 마련한 기금 18조 원이 다중채무자에게 재활로 가는 마중물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행복기금의 성과는 얼마를 지원했느냐가 아니라 몇 명이 재기에 성공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