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70대 중반의 은퇴한 사업가라고 소개한 독자는 “대학생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해본 사람으로서 ‘일본 정객들에게 고개 숙인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가 실린 22일자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고 전했다. 그의 비유가 재미있어 옮겨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박 대통령은 배곯는 처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무일푼으로 상경한 가장(家長) 신세였다. 먹고살려면 장사라도 해야겠는데 돈 구할 방법은 없고, 빌릴 데도 없어 궁리 끝에 대대로 원수였던 집안을 찾아가 고개 숙이고 피해 보상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한 거다. 처자식들을 위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린 거다. 그런데 정작 어렵게 구한 돈을 가져왔더니 처자식들은 ‘원수의 돈을 왜 받아왔느냐’며 오히려 가장을 탓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 하는 가장의 심정, 그게 아마 당시 박 대통령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잠시 끊기다 이어졌다.
“하지만 그땐 반일감정이 워낙 컸다. 우리보다 미개했던 나라가 좀 개화됐다고 형 같은 나라를 침략해서 온갖 몹쓸 짓을 다한 원수의 나라, 아무리 우리가 가난해도 그렇지 불과 수억 달러로 식민 지배를 청산한다니 굴욕 외교의 극치로 받아들여졌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 일본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20년이 채 못 된 시점이어서 일본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처지는 나라였다. 박 대통령도 이런 국민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회담을 비밀리에 진행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박 대통령이 1962년부터 진행해온 한일회담을 64년 초 공개하자 정국은 들끓었다. 1964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사설도 돈의 문제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라며 일본과 박정희 정부를 비판한다.
‘일본이 도대체 대한(對韓) 정책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해 우리는 다대(多大)한 의념(疑念·의심과 염려)을 금치 못하고 있다. … 일본으로부터 돈이나 물자가 들어온다고 그것이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고 안이하게 기대할 수는 없다. 미국으로부터 오는 돈이 줄고 있으니 일본으로부터 받아야 살지 않겠는가 하는 사고방식이나 중공(중국)에 먹히느니 일본에 기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사고방식에 우리는 반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상한 의지와 용기와 노력이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는 언론 지식인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져있는 반일 감정을 자극했다. 그러다보니 학생시위에서 출발했지만 대중들까지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커진 것이다.
한국 사회에 ‘4·19세대’에 이어 ‘6·3세대’라는 말을 만들어낸 6·3 학생운동은 1964년 6·3데모를 정점으로 연인원 350만 명이 참여해 1년 6개월여를 끌었다. 그 과정에서 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할 정도로 격렬했다. 1차례의 계엄령과 1차례의 위수령이 발동되는 동안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구속 제적되었고 수십 명의 교수들이 강제퇴직당했다.(6·3동지회 ‘6·3 학생운동사’)
한편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반발이 심했다.
2008년 4월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이 마련한 한일 국교정상화 기획기사에서 대학생 시절 일한회담 반대운동을 했다는 규슈대학 이시카와 쇼지 교수(법학)의 말이다.
“당시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과 학생들은 또다시 일본 자본이 식민지였던 이웃 나라에 마수를 뻗친다고 생각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은 전혀 인식하지 않는 일본 지배층이 미국과의 종속적인 동맹관계하에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을 특별히 지원함으로써 스스로의 연명을 꾀하고자 한다고 판단한 거다. 여기에 일본이 남쪽하고만 손을 잡아도 되는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이건 당시 나뿐 아니라 많은 학생들의 생각이었다. 개중에는 한국의 남쪽 정부에는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건너간 재일(在日) 조선인 학생도 있었다. 독재로 민중을 괴롭히는 남쪽보다는 비록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할지언정 북쪽에 자주성과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 내에서는 “우리가 합병 후 한국에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 덕에 한국은 우리 때문에 개화되고 발전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걸 또 사과하고 돈까지 달라고 하는가” 하는 (한국 비판) 여론이 지배적이었다.(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경제개발의 종잣돈을 마련해 보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회담 추진은 이처럼 국내외에 우군이 전무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한국 산업화는 출발부터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다. 정권의 존립 자체가 힘들 정도로 심각한 국민적 반대와 함께 시작해야 했으니 말이다.
6·3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 3·24데모는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완용과 이케다(池田) 일본 총리를 화형시키는 시위였다.
1964년 3월 24일 그날 시위현장에 김지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서관 아래 숲 속에 앉아 고장 난 책상 다리로 만든 이완용과 이케다 허수아비를 발로 짓밟고 불태우는 친구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떤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고 혼자 이리저리 방황을 하던 때였다. 하지만 관심이 없었을 리가 없었다. 김지하의 말이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마에 흰 띠를 두른 학생들은 땅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 허수아비들을 불태운 뒤 교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그날 저녁 원주로 떠나버렸다.”
3·24데모 이후 대학가는 연일 데모였다. 야당과 언론도 거의 매일 학생 데모를 지지하며 정부를 공격했다. 대학로, 종로5가에는 거의 매일 최루탄이 터져 눈물과 재채기 바다였다. 시위대 진압용으로 최루탄이 처음 등장했던 시기다. 다시 김지하의 말이다.
“조동일로부터 빨리 서울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최루탄 문학회’를 만들어 시화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모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 같아 신이 났다. 풍자시 정치시를 담아 시화전을 열었는데 대성황이었다.”
반(反)한일회담 시위는 점점 반박정희, 반정부 시위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서울대 성균관대 동국대 등은 5·16 3주년 4일 뒤인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대규모 연합시위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 이름 붙였다. ‘황소식(式)’은 당시 박정희가 이끄는 공화당의 상징물인 황소를 의미한 것이다. 군사정권과 박정희가 표방한 구호들이 허구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려 박 정권을 장례 치르겠다는 의미였다. 박 정권에 정면도전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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