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대검 중수부의 현판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심재륜 변호사(69·전 대구고검장)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그는 1997년 중수부가 진행한 한보 비리 사건 재수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를 구속하면서 ‘국민의 중수부장’으로 불렸을 정도로 중수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 현판을 정말 뗐다고?”라고 몇 번이나 반문하며 눈앞에 닥친 현실에 안타까워했다.
대나무를 형상화한 각진 글씨체로 쓰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현판은 이날 오후 3시 대검 청사 10층 중수부 사무실 앞에서 떼어져 대검 내에 만들어진 검찰역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1981년 4월 설치돼 대형비리 수사를 전담해 온 중수부가 32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심 변호사는 “세계 어느 나라도 현직 대통령의 아들들을 연이어 구속 기소한 사례가 없었다”며 “이는 모두 중수부라는 강력한 수사 시스템과 부패 척결에 대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말대로 중수부는 ‘너무도 잘 벼려진 칼’이었다. 1982년 이철희 장영자 부부 어음사기 사건부터 시작해 한보 비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율곡사업 비리, 현대차 비자금, 불법 대선자금 사건 등 ‘게이트’형 비리 수사들이 중수부의 작품이었다. 현철 씨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홍업 씨는 모두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 중수부 수사로 구속 기소됐다.
문제는 중수부라는 칼을 너무 쉽게 빼든 권력자에게 있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중수부는 극심한 정치적 중립 논란에 빠져들었다. 이후 C&그룹 비리 수사나 민주당 공천헌금 사건에서 야당 의원들은 끊임없이 중수부를 견제하는 목소리를 냈다. 지난해 대선을 거치면서 중수부는 결국 ‘국민의 뜻’에 따라 폐지 운명을 맞게 됐다.
하지만 ‘판옥선(板屋船·조선시대 수군을 대표하는 대형전투함)’이 사라졌다고 전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검찰의 칼끝은 계속해서 권력자의 부정부패와 경제질서를 어지럽히는 기업 비리를 겨눠야 한다. 중수부 수사 대체 시스템을 만드는 ‘검찰 특별수사체계 개편 추진 태스크포스(TF)’는 일선 청의 특별수사를 엄정하게 지휘·감독하는 컨트롤타워를 6월까지 만들어 내게 된다.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되 중수부의 순기능은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심 변호사의 고언처럼 검찰이 새로운 수사체계를 바탕으로 거악(巨惡) 척결에 나서 다시 한번 국민의 환호와 지지를 받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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