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동반 모임에 가면 배우자를 흉보는 것으로 시작하다가 결국은 은근히 자랑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모임에서 남편이 생일을 잘 챙기지 않는다는 불만이 대세를 이루더니 어느새 각자 받은 생일선물 이야기로 발전했다. 소경 제 닭 잡아먹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생일선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나는 막상 자랑할 게 없었다. 잠자코 침묵하던 남편이 어지간히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불쑥 말문을 열었다.
“저는 아내 생일에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느닷없는 말에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황당해했다.
“게다가 이날만큼은 회사에 출근하지도 않아요.”
이쯤 되면 좌중은 세 그룹으로 나뉜다. “멋진 아이디어네,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순진파와 ‘설마’ 하는 의심파와 ‘모자란 놈’ 하는 반대파이다. 역시 아내들의 반응이 더 적극적이어서 빙긋 웃고 있는 나에게 “정말요? 정말 태극기를 달아줘요?” 하고 묻는다.
“네.”
너무 짧은 대답이 미심쩍은지 나를 빤히 쳐다보는 분들에게 조금 뜸을 들이고 나서 덧붙이는 말은 이렇다. “사실 제 생일이 8월 15일 광복절이거든요.”
그러면 그렇지, 남편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아내들은 “그렇지만 생일에 태극기 다는 거 괜찮은 아이디어네”라고 말한다. 대화의 분위기가 바뀌면 이번엔 내 차례다. 몇 년 전 내 생일에 드라이브를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여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기뻐?”
생일날 이렇게 묻는 아내에게 “아니”라고 대답할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이건 숫제 대놓고 정답을 가르쳐주는 질문이다. 당연히 정답을 말하는 남편에게 너무 쉬운 질문을 한 것이 싱거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네.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사람을 기쁘게 했으니까.”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을 기쁘게 한 거야.”
“두 사람? 또 한 사람은 누군데?”
“당신 없었으면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했을 여자!”
그래서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두 사람이나 수지맞게 했으니 나의 생일에 태극기를 달 만도 하다. “그러니 여기 계신 분들도 이번 광복절에는 꼭 태극기를 달아주세요”라고 이야기했더니, 모두들 부창부수라고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광복절에 곳곳에서 태극기 멋지게 휘날리면 아마 그중 일부는 나의 생일을 축하하는 태극기라고 우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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