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기업 계열사 임원의 대한항공 기내 폭행 논란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대한항공 홍보실에 사건이 공개된 진원지를 물었더니 홍보실 관계자는 “YTN의 ‘단독’ 기사였다”고 했다. YTN 사회부 사건 데스크에게 물어보니 “제보를 받았다”고 했다.
기내라는 특수공간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단순 해프닝이랄 수 있는 이번 사건이 시간이 흐를수록 누리꾼 사이에서 빠르고 거세게 퍼진 것에 대해 한 대학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의 ‘갑’에 대한 ‘을’의 억눌린 감정이 대리 폭발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기내라는 밀폐된 환경 속에서 남자와 여자, 대기업 임원과 승무원,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에서만 먹을 수 있는 ‘끓여주는 봉지라면’ 등 권력적 요소와 통속적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SNS 특유의 평등, 정의, 피해의식이 골고루 녹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감정 노동’을 새롭게 돌아보자는 얘기들도 나왔다.
이번 사건은 SNS에서는 ‘선동자=오피니언 리더’라는 점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오프라인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흥분한 대중을 진정시키는 일을 맡는다면 사이버 공간에서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선동적 성격이 짙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해당 임원이 소속된 기업의) 구내식당 라면 끓이는 담당자는 신(神)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해당 임원은 한국 라면에 과도하게 들어 있는 나트륨 문제를 온몸으로 알리기 위한 ‘살신성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비꼬는 트윗을 했다. 소설가 공지영은 “소름 돋습니다. 이거 폭행죄 모욕죄 아닌가요?”라고 트윗했고, 개그맨 남희석은 “손님은 왕이다. 하지만 응대하며 일하는 사람이 하인은 아니다”라고 트윗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SNS 여론에 대해 고민해야 할 숙제들을 남겼다고 말한다.
우선, 공정성 문제이다. SNS 여론은 집단지성과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순기능이 있지만 이번 소동의 경우 대한항공의 기내 일지라는 일방적인 주장에만 기반해 이야기와 의견이 덧붙여졌다. 그래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대한항공과 승무원의 시각에서만 주로 전개되고 ‘가해자’라고 알려진 임원의 입장은 균형감 있게 다뤄지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죽 지켜보았다는 한 대기업 임원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번 일은 ‘초짜’ 임원이 지나치게 우쭐해져 일어난 것 같은데 어느 회사나 임원을 시킬 때는 도덕적 자질도 신중하게 평가한다. 그 임원이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는 현재 나온 팩트만 갖고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일부는 대한항공의 서비스 방법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한다. 한 누리꾼은 “지금껏 나온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대한항공의 비즈니스석 라면 서비스는 평소에도 다른 고객들로부터 불만을 많이 받아온 사항이라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회사 측이 미리 이런 불만들을 적극 반영하지 않아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해당 임원의 얼굴 사진은 물론이고 이름 나이 소속회사 직책 등 구체적인 신상들이 모두 인터넷에 공개된 것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는 의견도 많다. 한 누리꾼은 “법적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 신상 털기로 심각한 인권침해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형법상 명예훼손 또는 정보통신법 위반이지만 SNS에서는 거짓된 정보라 하더라도 최초의 유포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좁다. 법조인들에 따르면 현재 사이버 공간에서의 명예훼손은 30만∼100만 원의 가벼운 벌금형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해당 임원은 사표를 썼지만 대한항공이 반드시 승자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항공 기내 일지가 모조리 공개 유출됐다는 점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한 누리꾼은 “이번 일로 대한항공은 잠재적 고객을 잃었다. 기내에서 하는 모든 일이 만천하에 공개된다고 생각하면 누가 그 비행기를 타고 싶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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