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1964년 6월 3일 날이 밝았다. 검은 구름이 무겁게 내리깔린 서울 일원에는 간간이 비까지 뿌렸다. 이날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학생 시위가 가장 대규모로 이뤄진 날이었다. 서울지역 대학생 1만25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다 중앙청 앞까지 진출한 것. 동아방송은 당시 상황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저녁 6시경, 데모대는 청와대 바로 앞까지 진출했다. 청와대 앞 길목에는 대형 널빤지로 겹겹이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그 뒤를 군용 트럭이 받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시위대를 이끌던 김지하의 말이다.
“우리는 바리케이드 앞에 주저앉아 연좌에 들어갔다. 나는 시위대 앞에서 앞으로의 행동 방향을 설명하다 실신해버렸다. 서울대 의대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조치를 받고 다시 돌아와 쉰 목소리로 계속 외쳤다. ‘이 자리에서 죽읍시다. 어떤 경우에도 자리를 뜨지 맙시다. 우리의 각오에 따라 상황은 결판날 것입니다.’”
해가 점점 기울고 있었다.
갑자기 시위대가 술렁거렸다. 곧 진압이 시작될 것이고 계엄령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번졌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대 농대의 선언문과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구호와 노래가 이어지려던 순간,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폭음과 불빛이 터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최루탄이 시위대 머리 위에 우박처럼 쏟아졌다. 놀란 군중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일시에 무너졌다.
“움직이지 말라”는 지도부의 외침도 소용없었다. 김지하는 “물러서더라도 당당하게 퇴각하자고 쉼 없이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잠시 후 대오가 다시 정비됐다. 우리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방향을 동숭동으로 잡았다”고 말했다. 밤이 되어 문리대 단식농성장으로 다시 도착한 그는 시위대에 이렇게 말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장기적인 싸움이 시작됩니다. 모두들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운동장 스타디움 끝 야구장 펜스 철망을 넘어 피신했다.
그날 밤 9시 40분.
정부는 1시간 40분을 소급한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발효됐다고 선포했다. 계엄군은 6월 4일 서울로 진입하여 수도경비사령부 병력과 함께 시내의 요소를 장악했다. 학생 시위는 간단하게 진압되었다. 72일간 지속된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대단원이 내려지는 순간이자 박정희 정권 최초의 계엄령이었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는 박 대통령으로서도 정치 생명을 건 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1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일회담 당시) 박 대통령은 정권을 내놓고 대통령 직에서 하야할 결심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3일 미국의 버거 대사와 유엔군 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헬기를 탄 것은 당시) 데모대에 길이 막혀 차를 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의기소침해 있던 박 대통령을 격려하고 사태수습을 함께 논의했다. 그리고 오후 8시, 드디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부는 6월 3∼17일 계엄사범으로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언론인 7명이 눈에 띈다. 1명은 경향신문 정치부 윤상철 기자이고 나머지 6명은 최창봉 이윤하 조동화(이들 세 명은 7월 14일 보석으로 석방됨) 김영효 이종구 고재언 등으로 모두 ‘동아방송’ 관계자들이었다. 이들은 ‘앵무새’ 프로 때문에 구속 기소된다. ‘앵무새 사건’은 방송 최초의 설화사건이었다.
‘앵무새’는 매일 밤 9시 45분부터 5분간 방송되었던 프로였다. ‘아니 어째서 나라가 이렇게 되고 말았나’ ‘도대체 현 정부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때 묻은 짓을 했기에’ 등의 표현을 썼는데 이게 ‘내란 선동 선전’ 혐의를 받았다. 동아방송은 6·3시위를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등 시위 소식을 국민들에게 소상하게 알렸다. 가뜩이나 동아방송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정권이 ‘앵무새’ 프로를 트집 잡아 6명을 한꺼번에 구속한 것이다.
김지하는 서울 성북동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잔 뒤 이튿날 바로 원주로 내려간다. 학생운동권에 대규모 검거령이 떨어졌으니 빨리 몸을 숨길 작정이었다. 인적 드문 강가 같은 곳에 가서 텐트를 치고 혼자 숨어 있을 작정이었다. 원주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6월 5일 아침 짐을 챙겨 집을 나서려던 순간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서울 동대문경찰서로 끌려간 그는 “혐의를 연신 부인했지만 수도 없이 쏟아지는 시위 현장사진 때문에 아무 소리 못하고 기소됐다”고 한다. 김지하는 서대문구치소로 넘겨졌다. 생애 첫 감옥 체험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6월 13일 대학은 그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린다. 다시 그의 회고다.
“감옥에서 보낸 그해 여름은 정말 더웠다.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중죄인이 아니어서 일반 잡범과 한방에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역사의 엄중함을 알았다고나 할까… 접견 대기실에서 뭐라고 따따부따 하는 교도관들에게 ‘이래봬도 나는 대통령과 싸운 사람이야, 함부로 하지 말라고’라며 대드는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 대단하다고 느꼈다. 애당초 나는 정치나 권력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감옥에 갇혔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지하는 생애 처음 감방 체험을 하면서 ‘서대문 101번지’(서대문구치소를 말함)를 비롯해 교도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감방생활을 표현한 ‘삼천리 독보권(獨步權)’, 전과 20범인 마약중독자 안씨와의 대화를 통해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밑바닥과 만난 심경을 드러낸 ‘여름 감방에서’ 등의 시를 썼다.
정부는 비상계엄을 내린 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7월 29일 계엄을 해제했다. 이어 9월 15일 구속 학생들을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김지하도 9월 20일 석방된다. 석방 며칠 뒤 무기정학도 풀렸다.
김지하가 짧은 감옥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1964년 가을 국제정세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의 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흑인들의 인권운동과 베트남 전 반대운동, 히피 운동이 불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독재에 항의하는 스님들의 분신이 잇따랐다. 김지하는 “책에 파고들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야 할지 그야말로 사상의 탐색기였다”고 말한다.
계엄령 해제로 이제 숨 좀 쉬고 살만해졌나 싶었는데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의 돌연한 발표로 정국은 다시 긴장국면으로 들어선다. ‘1차 인혁당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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