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3대 세습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제 나름대로 책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도자가 대접을 받으려면 국내 통치에 못지않게 대외관계에서도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의 지도자 교체로 촉발된 주변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김정은의 리더십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기(期) 정부에서 어떤 대북(對北)정책을 펼칠 것인지도 김정은에게는 초미의 관심사다.
“앉아서 밀려올 변화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선제적으로 움직일 것인가.” 거의 동시다발로 이뤄진 주변국의 권력 교체를 보며 김정은은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결론은 앞장서서 ‘새판 짜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내려졌다.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은 한미중일 정상에게 보내는 김정은의 공개 선언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 보유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북한을 다시 보라는 것이다.
북한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도 새로운 남북관계 설정을 주도하려는 전략으로 읽어야 한다. 개성공단은 김정일이 시작한 사업이다. 김정은은 아버지가 물려준 사업을 접는 것이 불효임을 알면서도 개성공단에 손을 댔다. 그만큼 새판 짜기를 주도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북한이 시작한 새판 짜기의 중간결산을 해보면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강경론 속에 ‘도발→대화→보상’의 과거 패턴으로 돌아갈 듯한 기미도 보인다. 한국과 미국이 대화 제의를 하고 중국은 셔틀외교를 시작했다. 북한의 협박에 묻혀 지난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대북 제재 결의 2094호는 가뭇없이 잊혀졌다. 북한이 조금만 버티면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강성국가’로 공인받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분위기다.
북한 멋대로 새판을 짜도록 양보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 방법은 있다. 한국과 중국이 과거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된다.
개성공단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아무리 남북관계가 좋아져도 개성은 북한 땅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개성공단을 5·24 대북제재에서 제외하고 오히려 몸집을 키웠다. 북한이 천안함 폭침을 일으킨 2010년 3월 4만2000여 명이던 북한 근로자는 올 1월 5만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3000만 달러이던 월 생산액도 36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제재를 외치면서 개성공단을 키우는 남한 정부를 보면서 북한은 약점을 알게 됐다며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북한은 박근혜정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통행 제한과 근로자 출근 중단 카드를 휘둘렀다. 북한의 판단이 잘못임을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다. 우리 체류자 철수로는 부족하다. 개성공단은 남한에서 공급하는 전기로 가동된다. 한전이 경기 파주시 문산변전소에서 개성공단에 이르는 16km 구간에 송전탑 48기를 세우고 송전선을 가설해 전기를 보낸다. 한전이 개성공단에 건설한 ‘평화변전소’도 우리 재산이다. 전기 공급을 차단하면 북한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개성공단은 움직일 수 없다.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우리는 중국의 원유 공급 중단을 촉구했다. 지금도 유엔 제재의 실천은 중국의 동참 여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지난달 중국의 대북 원유 수출량은 10만6000t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8.2%가 증가했다. 우리가 개성공단에서 밀리면서 중국에 강력한 제재를 요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강한 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마다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은 ‘개성공단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며 개성공단은 족쇄라고 했다. 우리가 족쇄를 벗어던져야 중국을 움직일 동력이 생긴다. 중국을 움직여야 김정은이 꿈에서 깨어나 냉혹한 현실을 보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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