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과 관련된 속설 중에 ‘부대 안은 춥다’는 말이 있다. 담장 하나만 넘으면 꽃 피고 새 우는 봄인데 희한하게 부대 안은 밖과 달리 춥다는 말이다. 실제 기온 탓인지 아니면 마음의 상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군 경험자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병영생활 전문상담관 박주분 씨(59·여) 인터뷰를 위해 11일 강원 화천군 화천읍 육군 7사단을 찾은 날도 그랬다. 4월 중순인데도 부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비가 내렸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고, 아무리 껴입어도 춥다는 군 생활. 사실은 몸보다 마음이 더 외로운지도 모른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말해도 사랑하는 애인과 친구와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심정이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당사자도 그렇지만 아들을 군에 보낸 가족들의 심정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다. 국방부에 따르면 올 들어 2월 초까지 군 자살자 수는 1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명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입대자가 늘어나는 봄철에는 그만큼 걱정을 하는 사람도 늘 수밖에 없다. 》
백발인 박 상담관은 이곳 전방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장병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병사들은 남성 중심의 꽉 짜인 규율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군대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요즘 장병들은 어떤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까. “아무래도 여자친구 문제가 많을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요즘 병사들은 예전보다 연애 문제를 깊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생각보다 ‘쿨’하다고 할까? 나도 놀랐는데 여자친구보다는 엄마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엄마와 떨어져 있다 보니 느끼는 허전함 또는 의지처가 없어진 것 같은 것이다. 또 엄마가 군에서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힘들어할까 그런 것도 고민하더라.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불효자(?)인 기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대 차이였다. 효자가 많아진 것일까, ‘마마보이’가 늘어난 탓일까.
가족에게 복용하는 약까지 알려줘
―요즘 엄마들의 과보호 때문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 입대한 지 몇 년이 됐는데 아직도 부대로 아들 바꿔달라고 전화를 걸어오는 부모님도 있으니까. 그래서 요즘은 군대에서도 장병 관리를 독자적으로 하지 않고 부모와 연계해서 한다. 예를 들면 A 장병이 복용하는 약을 잘 먹고 있다는 것까지 가족에게 알려준다.”
―상담 중에 자살한 병사도 있었나.
“자해를 한 경우는 있다. 자해는 자기 비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자기 보호 방법이다. 자신이 얼마만큼 화가 나고 힘든지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비하감에 ‘나 같은 놈이 살아서 뭐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위로받고 싶은…. 선임병에게 혼난 병사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다리를 칼로 그어 자해한 적이 있었다. 약간 상처가 난 정도였는데 다음 날 붕대를 친친 감고 있더라. 사람들이 잘 안 알아주니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거였다.”
박 상담관은 병사들 상담의 특징으로 상담자와 내담자의 일대일 관계가 아닌 부대까지 포함한 3자 관계라는 점을 들었다. 사회와 달리 군인이라는 특성상 관리와 조치를 위해 일정부분 부대와 상담 내용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담 윤리상 내용을 모두 공개하기가 곤란하다. 박 상담관은 “자살이나 사고 유발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모든 내용을 부대와 공유하지만 그 외에는 내담자와의 비밀 유지를 우선으로 한다”고 말했다.
―요즘 군대가 예전 군대 같지 않다는 말도 있다.
순간, 그가 책상을 탁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순간만큼은 인자한 상담사가 아니라 예전 엄한 우리네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 국가나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곳곳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학교, 가정은 가정, 군대는 군대, 직장은 직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학교가 집 같고, 집도 학교 같고, 군대도 학교 같고, 이렇게 변했다. 아이들이 군대에 와서도 집에서 하던 대로 하려는 경우가 많다. 나는 상담을 하기 때문에 ‘야! 여기가 너희 집이냐’ 이렇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상담을 통해 치료도 하지만 여기는 집이 아니라는 점을, ‘네가 군대를 집처럼 생각하는구나’ 하는 점도 꼭 알려준다.”
(기자는 그의 말을 들으며 훈련소 시절 일이 떠올랐다. 비 온다고 연병장 대신 내무반 침상에서 태권도 훈련을 받았었다. 편하기는 했지만 당시에도 ‘전쟁 중에 비가 오면 내무반에서 싸울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군대를 집처럼 생각하는 이등병도
―그런 말을 상담 중에 하기는 어려울 텐데….
“상담 중에는 어렵고 교육 중에 한다. 특히 갓 입대한 이등병들에게는 ‘군대는 힘든 곳’이라고 꼭 말한다. 사회보다 힘들다고. 외국 유학이 힘들다고 안 가지는 않는다. 외국에서 배울 것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듯 군대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에 집중한다면 복무 기간이 유익할 것이라고 말해준다. 군대는 집, 학교처럼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 아니다. 이걸 분명하게 알려줘야 입대하는 사람도 마음이 달라지고, 여기(군대)에 온 목적에 맞게끔 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공부해 자격증 딸 생각을 하고 군에 오면 군 생활이 즐거울 수 있을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장병들이 가장 상담하기 어려운가.
“군 생활을 기피하려는 경우다. 실제 마음은 군 생활을 안 하고 싶은데 이를 감추고 벌어진 일만 이야기한다. 군 생활 자체가 싫은 아이들은 다른 병사와 마찰이 있을 경우 진짜 마찰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과 다르다. 진짜 마찰 때문에 고민하는 병사들은 상대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면 되지만 이런 아이들은 관계를 복원시켜 준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황을 눈치 채고 ‘너 사실은 이런 이유지?’라고 물을 수도 없다. 묻는 순간 입을 닫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나.
“포기할 수는 없지. 많이 오해들을 하는데 상담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또 상담받는다고 단번에 확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들어주면서 서로 이해하고 위로받는 것이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치료는 스스로 ‘아프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박 상담관은 “‘아픈’ 장병들의 경우 군에 와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입대 전부터 마음속에 있던 문제가 입대 후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특히 아무데나 화를 내는 병사들이 있는데 이는 주변에서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라는 것. 한 병사의 경우 상담을 해보니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고 뛰어난 누나와 비교를 많이 당하고 자랐다고 한다. 자기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나는 안 돼’ 하는 좌절감을 계속 느껴왔다는 것이다. 박 상담관은 “사회에서도 그랬는데 군대는 사회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더 적지 않으냐”며 “그때마다 화를 내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화를 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안정을 찾아주나.
“일단 그 병사와 충분히 이야기한다. 얼마나 화가 나고 힘든지. 필요하면 가상의 대상을 설정해서 감정을 표출하게도 해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나고 자신감이 떨어지는지 알게 해준다. 선임병에게 무시당해 화가 났다면 실제로 함께 매점을 간다든지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해 이야기하도록 한다. 대체로 지레짐작으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실제 대화를 나누면 상대방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꾀병속에서 진짜 아픈 마음 찾아내
―별것 아닌데 주변에서 너무 ‘아프다, 아프다’ 하면 진짜 아픈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까.
“상담자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마음이 내방자가 왕이라는 생각이다. 상담 온 병사가 아프다면 아픈 것이다. 물론 나도 항상 그런 마음을 갖지는 못한다. 어떤 때는 속으로 ‘꾀병 부리지 마’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면 절대 안 된다. 그래서 군 간부들에게 ‘꾀병도 병’이라고 알려준다. 꾀병을 부리는 사람도 스스로는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 주관적 차이를 쉽게 재단할 수 있겠나. 물론 꾀병을 악용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지만 악용하는 사람 때문에 진짜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놓치면 안 되니까….”
평범한 주부가 어떻게 병사들의 심리상담을 하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어떻게 병사 상담을 하게 됐나.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고 5년 정도 교사 생활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그만뒀다. 직업군인인 남편이 서울대 학군단장으로 있을 때 학생들을 많이 만났는데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서울대 학생들도 내적 고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부터 상담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서울의 한 상담센터에서 상담 관련 공부를 했고 45세 늦깎이 나이에 대학원 사회복지과정에 진학해 본격적인 상담사 일을 하게 됐다.
상담을 공부하는 과정에 남편 요청으로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사들을 틈틈이 상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의 고충과 고민을 많이 들었는데 누군가 조금만 옆에서 도와주면 훌륭하게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갈 병사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자원봉사 식으로 했다. 그러던 중 2008년 육군 병영생활 상담관 채용공고가 났고 본격적으로 상담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지원했다. 처음에는 철원 6사단에서 2년간 일했고 지금은 이곳 7사단에서 일하고 있다.”
육군 내 병영생활 상담관은 2005년 6월 경기 연천군 28사단 530 감시초소(GP)에서 총격 난사 사건이 발생한 후 병사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치료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계기가 됐다. 현재 육군 내 모두 137명이 있으며 이 중 98명이 여성이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복무 중이거나 입대를 앞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훈련 자체가 힘들어 문제를 일으키는 병사는 의외로 적고 대부분 사람 사이의 관계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관계도 훈련이 필요한데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훈련을 받을 기회도 적고, 하기 싫거나 안 해본 것은 안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는 군 생활은 인간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복무 기간에 관계형성이나 갈등을 잘 푸는 방법을 배운다면 사회에 나가서도 환영받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청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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