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을 주도한 혐의로 수감된 김지하가 서대문구치소에 있던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돌연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북괴(北傀)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일으키려던 인민혁명당을 적발,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다”는 것이었다. 정보부는 이어 “3월 24일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순수한 학생데모가 일어나자 인혁당이 주동 학생들을 포섭해 전국 학생 조직에 지령을 내리고 현 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데모를 계속 조종함으로써 북괴의 지령에 따라 암약해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사건을 배당받은 공안부 검사들조차 공소장에 서명하기를 거부할 정도로 조사내용이 허술했다. 한국인권옹호위원회 박한상 의원은 구속된 도예종 등 26명 대부분이 중앙정보부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1964년이 저물고 있었지만 6·3은 끝난 게 아니었다.
1965년 1월 9일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 1주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되든, 안 되든 금년에는 (한일회담을) 매듭짓겠다”고 했다. 2월 17일 시나(椎名) 일본 외상이 내한하자 전국 각 대학에 ‘학원방위군’이 조직되는 등 학원가는 다시 출렁였다. 하지만 학생운동권은 거의 지리멸렬 상태였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운동 주도 세력들도 대부분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거나 수배상태에 있었다. 이들에게는 정학, 제적조치까지 내려져 있었다.
1964년 가을, 석 달여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김지하는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가깝고 오랜 선후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중에서도 함께 연극을 하며 김지하를 아껴주었던 김기팔(1937∼1991·서울대 철학과·1970년대 유명했던 극작가)과의 인연이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출옥 후 가족 말고 처음 만난 사람이 김기팔 형이었다. 형은 술자리 내내 내게 ‘야 빨갱이 술 먹어’라고 놀렸다. 나는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형의 본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참 술이 오르고 나자 형이 ‘야 이 빨갱이! 이젠 다시 감옥에 가지 마라’ 하며 엉엉 울었다. ‘빨갱이’라고 나를 놀렸지만 내게 앞으로 닥칠 운명 같은 것을 예감했는지 다시는 감옥에 가지 말라고 통곡한 것이었다.… 그런데 운명이란 참 묘한 것이다. 죽을 것 같던 나는 살고 죽지 말라던 그는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너무나 억울하고 너무나 허망했다. 요즘도 살다가 외로울 때면 혼자 입속으로 가끔 ‘기팔 형’하고 불러본다. 그러면 어디선가 허공에서 덧니를 드러내고 킬킬 웃으며 평안도 사투리로 ‘왜 그래? 이 빨갱이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금은 나도 술을 끊었지만 가끔 기팔 형이 생각나면 허름한 주점에 혼자 앉아 그를 생각하며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1964년에서 6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을 서울에서 칩거하며 지내던 김지하는 깊은 ‘허무’에 빠진다. “청춘이 너무 무거워 어서 빨리 늙기만을 바랐다”는 그는 러시아의 자살한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에게 빠져들었다. 예세닌은 서정시를 주로 쓰다가 러시아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는 등 혁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내면적 소외와 고독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했다. 김지하는 그 무렵 예세닌의 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도입부를 읽으며 전율했다고 한다.
‘폭풍은 지났다/소수의 사람만이 무사하였다/이젠 소리 높여 서로를/이름 부르는 사람마저도 드물어졌다’는 대목이 6·3이라는 폭풍이 지나가고 선후배들이 모두 사라진 뒤의 쓸쓸함에 사로잡혀 있던 김지하의 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새 학기가 되자 친구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대학가에도 봄기운이 돌았다. 김지하는 운동권 후배들과도 계속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후배들로부터 1차 6·3의 시작이었던 1964년 3·24데모 1주년 때 읽을 선언문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65년 3월 22일 김지하는 송철원 박재일 최혜성과 함께 우학명(지리학과·2007년 작고) 집에 모인다. 다음은 송철원의 회고다.
“선언문 초안을 김지하가 썼다. 한참 글을 쓰고 있던 김지하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박재일이 가지고 있던 ‘말똥종이 책’(마분지로 된 책. 물자가 없던 시절이라 뚜꺼운 재생지를 썼다) ‘코민테른 선언·강령·규약’이었다. 김지하가 한 대목을 짚었다. ‘아메리카 자본은 신용이란 굳센 쇠사슬로 구라파 제국(諸國)과 남아메리카 제국을 자기 몸에 얽매어 놓은 뒤, 이들 제국이 감히 자기의 신성한 의지에 저항이라도 하려고 하는 날이면’…이라는 대목이었다. 김지하가 우리에게 ‘이 대목을 선언문에 빌리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서 우리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김지하는 선언문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동남아 공영권의 시대착오적 망상에 사로잡힌 제국주의 일본 해적배들은 또한 저들대로 선린외교라는 굳센 쇠사슬로 일련의 동남아를 자기 몸에 얽매어 놓은 뒤, 이들 제국이 감히 자기의 신성한 의지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저들 비전(秘傳)의 예리한 일본도를 갈고 있다.’”
일행은 이렇게 완성된 ‘3·24 선언문’ 초안과 송철원이 쓴 ‘격문’ 초안을 함께 검토한 후 최종 확정했다. 다시 송철원의 말이다.
“다음 날 오후 인쇄소에서 400부 정도를 인쇄해 준비를 모두 마쳤는데 후배들로부터 우리가 만든 문건들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는 기별이 왔다. 우리는 소식을 듣자마자 인쇄물을 친구 집 아궁이에 넣고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 문건은 어찌된 영문인지 검찰 손에 들어가 9월에 송철원 등이 끌려가고 김지하가 또다시 수배되는 증거로 활용된다. 검찰은 코민테른 선언·강령·규약에서 따온 선언문 문장이 “북괴 및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1965년 6월 22일 오후 5시 도쿄 일본 수상관저에서 양국 외무장관 이동원과 시나가 서명함으로써 한일교섭이 종지부를 찍었다. 국교 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한일 기본조약과 4개 협정이 조인된 것이다.
국회비준 절차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대학가 시위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8월 중순 이후 각급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시위가 다시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당국은 8월 26일 계엄선포나 다름없는 위수령을 발동한다. 1차 6·3에 비해(1964년 3월 24일∼6월 3일) 길었던 제2차 6·3(1965년 2월 18일 파고다 공원 ‘이등박문 망령 성토 학생대회’에서부터 8월 26일 계엄 선포까지)이 막을 내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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