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가 병원에 있던 1967년은 제6대 대통령선거(5월 3일)가 있는 해였다. 여당 공화당은 “박 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건설 계속하자”를 구호로 내세웠고 야당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치자”로 맞섰다.
판도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일협정에 따른 외화가 종잣돈이 되어 경제개발의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5년 외환보유액이 1억4600만 달러였던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공짜로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나눠 받고, 경제협력 명목으로 2억 달러를, 무역차관 명목으로 1억 달러를 빌리기로 한 것은 경이적인 액수였다.
한국의 경제개발은 초기엔 실적이 저조하다가 1965년부터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6년부터는 10% 이상 고도성장 시대가 열렸다. 한국은행은 1966년 12월 공식 발표를 통해 1966년 경제성장률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치인 11.9%(1인당 국민소득 131달러)라고 밝혔다. 1966년의 경제성장률은 1960년대 전반기(60∼64년) 성장률 5.5%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훗날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71년)을 결산해 보니 연평균 성장률이 8.5%나 됐다.
한편 이처럼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끌게 해준 또 다른 견인차로 ‘월남 파병’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962명(국방부 공식 발표), 8만9708명의 고엽제 피해자(2세 64명. 국가보훈처·2012년 기준)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월남 파병이 한국 경제에 일본 경제를 부흥시킨 6·25전쟁 같은 것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국은 1964년 9월 12일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 파병을 시작으로 1965년 10월 14일 제2해병대여단(청룡부대)을 필두로 한 전투부대가 잇따라 파병된다. 이어 1973년 3월 23일까지 총 32만5517명(국방부)의 병력이 파병된다(베트남전은 1975년 4월 30일 미국의 중단 선언으로 끝난다).
한국군 파병은 원래는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제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과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미국 원조를 받는 입장에서 무조건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한국처럼 자립 의지가 있는 나라에 우선적으로 해 달라”고 역설하면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월남 파병을 제안한다. 당시엔 베트남 상황이 심각하지 않아 케네디 대통령은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후 ‘더 많은 국가(More Flags)’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존슨 대통령이 한국에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한다.
파병에 따른 파월 장병들의 수당 지급액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총 23억5500만 달러(국방부)에 달했다. 여기에 덧붙여 2005년 8월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9년간의 참전으로 미국 군사원조 증가분 10억 달러+파병에 따른 미국의 경비지출 10억 달러+전쟁특수에 따른 외화수입 10억 달러+기술 이전과 수출진흥지원금 20억 달러 등 총 50억 달러의 외화 수입 효과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외환보유액도 1964년 1억2900만 달러에서 1970년 5억8400만 달러, 1973년엔 10억9400만 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국제신인도도 올라가 수출도 잘됐으며 외국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쉬워졌다. 1967년 한 해만 해도 상업차관이 2억3000만 달러에 달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베트남 파병은 이처럼 경제개발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남의 나라에 일자리를 얻어 집단적으로 한국인들이 움직였다는 점에서 최초의 국제화였다. 베트남으로의 인력 진출이 최고에 달했던 1969년에는 1만5500명이 넘었고, 진출 기업도 최고 79개 업체에 달했다. 수송업 진출 등으로 한밑천을 잡은 한진그룹은 이후 항공산업에 뛰어들어서 오늘의 대한항공으로 발전한다.
훗날 중동으로 뻗어 나갔던 해외건설 진출의 기초도 베트남 전쟁터에서 닦았다.
또 하나 중요한 성과는 군(軍)의 현대화였다. 파병 전까지만 해도 국방예산을 미국에 크게 의존해 오던 한국군의 무기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수준의 구식이었으며 화력도 북한에 크게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봉급 군복 무기 병참 등 모든 비용을 미국 정부가 부담한다는 조건은 참전군인은 물론이고 휴전선을 지키는 한국군에도 적용됐다. 여기에 파병 30여만 명이 실전 경험을 쌓았다. 실제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한 현역 장군은 기자에게 “당시 미국의 최첨단 무기들을 몰래 빼내 한국으로 가져와 모두 분해한 뒤 다시 만들어보기도 했다. 베트남전은 한국군 무기의 현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전한다.
껄끄러웠던 미국과의 관계도 대폭 개선됐다. 주한미군 병력을 베트남 전선으로 빼려는 미국의 구상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어떻든 경이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1967년 대선 결과는 박정희 568만8666표(51.5%), 윤보선 452만6541표(40.9%)였다. 압도적 승리였다.
이제 박정희가 넘어야 할 산은 총선이었다.
집권 여당으로선 모든 총선이 다 중요하지만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선거는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중요한 선거였다. 1967년 선출된 박 대통령의 임기는 1971년까지였다. 그런데 이미 1966년부터 측근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제대로 만들려면 박 대통령이 세 번은 해야 한다”는 논리가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려면 헌법에서 규정한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풀어야 하는 개헌을 해야 해 총선에서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므로 총 175석 가운데 최소 117석 이상이 필요했다.
실제로 공화당과 정부는 전쟁을 한다는 심정으로 국회의원선거에 돌입했다. 결과는 129석을 얻은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신민당은 개헌 저지선(59석)에 14석이나 모자란 45석을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공화당) 선거자금이 통반(統班)조직, 상대방 선거참모 매수자금, 군소정당 후보자 사퇴자금으로 흘러 다니며 (선거) 타락이 판을 쳤다.’(196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
대학가에 6·8 총선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벌어졌다. 6월 13일 서울 21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다. 그리고 7월 8일엔 동백림(東伯林·당시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을 한자로 음차) 사건이 발표된다. 대학교수, 의사, 예술인 및 공무원 등이 동독 주재 북괴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밝힌 명단에는 작곡가 고 윤이상, 화가 고 이응로, 고 천상병 시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 최종심에서 간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당시 박 정권이 6·8 부정 총선 규탄 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건을 부풀려 발표했다”고 발표했다. 고 천상병 시인의 경우 모진 고문을 받아 동베를린에 다녀온 친구가 간첩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허위자백을 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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