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백년전쟁’의 왜곡을 대한민국 正史로 만들 순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일 03시 00분


대통령선거를 앞둔 지난해 11월 26일 민족문제연구소는 유튜브에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을 올렸다. 이승만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을 악의적으로 매도하고 인신공격을 하는 내용이었다. 이 동영상은 이승만을 ‘친일파’ ‘파렴치범’ ‘갱스터’로 규정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미국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였으며 그의 리더십으로 한국 경제가 발전했다는 것은 허구라고 주장했다. 지난 100년 동안의 우리 근현대사가 ‘친일 수구파’와 ‘반일 자주파’의 대결이었으며 지금도 양 진영 사이에 총칼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관(史觀)을 가진 극좌파 세력이 제작한 것이다.

이 동영상의 인터넷 조회가 200만 건을 넘어서면서 우파 쪽에서도 대응에 나섰다. 사단법인 건국이념보급회와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은 ‘백년전쟁’의 내용이 대부분 허위이자 왜곡이라고 반박하는 동영상을 제작해 4월 26일 유튜브에 올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유족인 이인수 씨도 어제 민족문제연구소를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현재 유튜브에 올라 있는 ‘두 얼굴의 이승만’과 ‘프레이저 보고서-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라는 2편 이외에 새로운 동영상을 선보이겠다고 예고했다. 우파 진영에서도 10여 편으로 구성된 반박 동영상의 후속편을 더 내놓을 계획이다. ‘백년전쟁’으로 촉발된 한국현대사 논란은 한층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백년전쟁’은 역사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의 선전물 성격이 강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측도 “상상력이 가미된 창작예술품”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총선 대선을 앞두고 일부 좌파 진영은 양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은 뒤 민주화운동 직후 이뤄진 ‘1987년 체제’를 포함한 ‘낡은 체제’를 허물고 ‘2013년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말하는 ‘낡은 체제’란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과 박정희의 산업화가 이룩했거나 이를 계승한 틀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존의 평가와 인식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그에 꿰맞추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인다. 초대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 가면 대한민국 건국의 정체성을 가장 손쉽게 깎아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기존 학계에서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연구 결과가 나온 적이 없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었던 ‘친일인명사전’에도 이승만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다. 이 동영상은 이승만의 미국 신문 기고문을 친일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으나 자료를 왜곡한 것이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1916년 기고문에서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고 밝힌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와이 한인 학교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가르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한 민족으로서 권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나와 있다. 이승만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이승만이 오히려 일본의 제거 대상 1호였다고 밝히고 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독립운동자금을 멋대로 쓴 ‘파렴치범’으로 몰고 있으나 주로 이승만에게 반대했던 세력의 일방적인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 적대관계에 있는 쪽의 자료는 객관적 증거로서 신뢰하기 어렵다. ‘백년전쟁’은 노디 김이라는 여성과의 관계도 들춰내고 있지만 이를 위해 사용한 사진은 조작된 것이다. 이승만과 노디 김이 10년 시차(時差)를 두고 각각 찍은 사진을 마치 경찰이 같은 날 촬영한 범죄용의자 사진인 것처럼 화면을 구성했다.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에서 받은 박사학위도 실력이 아니라 미국 기독교계가 봐줘 따게 된 것으로 묘사했으나 이승만의 학위논문은 다른 논문에 인용됐을 뿐 아니라 프린스턴대가 단행본으로 출판까지 했다.

이승만 박정희의 功過,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박정희에 대한 동영상도 대선을 앞두고 그의 딸 박근혜 후보에게 흠집을 내기 위한 의도가 강하다. ‘백년전쟁’은 박정희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으나 미국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직전 장면 정부 때에도 경제개발 계획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개발계획을 갖고 있는가, 갖고 있지 않으냐가 아니라 리더십에 의한 목표 달성 여부다. 박정희는 집권 초반 수입대체 전략을 추구하다가 잘못된 방향임을 깨닫고 수출 주도 전략으로 전환해 오늘날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박정희의 경제 분야 업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국민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국내 평가가 분명한데도 미국에서 끌어온 자료를 짜깁기해 억지 논리를 펴는 것은 대한민국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功)과 함께 분명히 과(過)도 갖고 있다. 이 대통령은 3·15부정선거가 촉발한 4·19혁명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박 대통령의 유신독재는 장기집권을 위해 저지른 명백한 과오다. 두 대통령의 공과 과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균형 잡힌 시각으로 평가하면 된다. 정치적 목적을 갖고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국민도 우리 사회 일각의 심각한 역사 왜곡에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학술 영역에서 활발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옥석을 가리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한 ‘백년전쟁’을 정사(正史)로 만들어 줄 순 없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