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집중해야 할 피 같은 시간에 연구원들이 커피 마시면서 농담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한두 번 두고 보다가 더이상 참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얼마 전에 가위를 들고 나가 자판기 전깃줄을 잘라 버렸어요.”
2002년 한 국내 전자업체의 디스플레이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연구원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하던 연구소장이 한 이야기다. 당시 이 연구소는 ‘능동형 유기EL(전계발광소자)’ 디스플레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최근 LG전자가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삼성전자가 상반기에 내놓을 예정인 능동형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 TV는 이렇게 11년 전 이미 개발되고 있었다.
연구원들을 너무 들볶는 것 아니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기술 개발의 성패는 핵심인력 몇 명, 몇십 명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람 많아 봐야 소용없는 거죠. 그래서 기초기술이 좋고 인력도 우수한 미국, 일본을 한국 전자산업이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핵심인력이 1분 쉬면 몇 년 뒤에는 몇 달 이상 기술격차가 벌어지는데 농땡이 부리면 안 되는 거죠.”
전설적 싸움꾼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싸움의 법칙’ 가운데 “적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 나와 싸우는 사람은 내 주변의 4명뿐”이라는 대목을 연상시키는 설명이었다.
1년 만에 처음 쉬는 추석날 차례 지내러 가족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다가 호출을 받고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혼자 내려 돌아온 사연 등 그 연구소 연구원들이 들려준 얘기 중엔 기막힌 내용이 한둘이 아니었다. 연구소 안에서 ‘교주(敎主)’로 불리는 팀장들과 그 밑에 딸린 팀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하지만 전자산업의 미래를 내 손으로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공휴일이 일요일일 때 그 다음 하루를 더 쉬도록 하는 ‘대체휴일제’와 관련한 최근의 논란이 오래전 취재의 기억을 불러냈다. 원래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후보의 대선 공약이던 대체휴일제는 박근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논란이 가열됐다.
단 며칠이라도 꿀맛 같은 연휴가 생기는 건 월급쟁이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그런 만큼 직장인들 사이에서 반대 의견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에 기업, 자영업자 등은 인력 부족, 인건비 증가 등을 들어 극력 반대하고 있다. 정부 안에서도 문화, 관광산업 활성화를 책임진 문화체육관광부는 찬성하는 반면에 경제 부처들은 기업 부담이 커질 것이라며 반대하는 분위기다. 청와대는 무리한 조기 도입에 부정적이지만 표를 의식한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찬성 쪽 목소리가 높다.
이렇게 진행돼 온 대체휴일제 논쟁에 빠진 게 있다. 한국 경제의 ‘핵심 경쟁력’에 대한 고민이다.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이 중진국 위치에 올라선 이유를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인, 연구원, 관료 등 우리 사회 엘리트들의 ‘무한헌신’이 우리 경제의 성장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 게 경험을 토대로 굳어진 기자의 믿음이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서비스업을 중시하는 ‘창조경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간과되는 부분도 있다. 과거 성장을 이끈 지난 세대 엘리트들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전자, 자동차, 조선 등의 분야에서 ‘창조적 수준’에 도달했다. 한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되는 데 주 5일, 하루 8시간 기준으로 10년이 걸린다는 ‘2만 시간의 법칙’을 우리 경제의 주역들은 주 6∼7일,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를 통해 단기 압축적으로 달성했다.
도입해봐야 공휴일이 며칠 늘어나는 것뿐이라는 점만 보면 대체휴일제는 별것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일은 적게 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쪽으로 사회 전체가 방향을 바꿀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쉴 새 없이 경제의 엔진을 돌려온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는 이들에게 지금까지와 같은 헌신을 기대할 수 있을까. 글로벌 경쟁에서 우리 경제에 승리를 안겨 준 ‘싸움의 법칙’을 바꾸기 전에 깊이 고민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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