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6월 김지하는 2년 반 만에 퇴원한다. 그리고 2개월 뒤 취직을 한다.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폐결핵으로 몸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도 생활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생겼다. 게다가 아버지의 벌이도 시원치 않아 외아들인 그로서는 돈을 벌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한 마케팅 회사 카피라이터로 들어간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마케팅에 관해 책도 읽고 토론도 했다. 당시 김지하를 거쳐 간 카피는 담배인삼공사에서 수입한 버지니아 잎담배 광고와 “당신은 대한항공에서 언제나 양반 대접을 받습니다”라는 큰 제목 아래 한국의 ‘양반’에 대한 개념 설명과 서양인이 통영갓을 쓰고 앉아 있는 기내 사진이 크게 확대된 광고였다고 한다. 그의 회고다.
“당시 일하면서 미국광고협회 회장의 연설문을 읽은 게 기억난다. 그 회장은 ‘오늘날의 광고와 마케팅에서는 콘텐츠와 관련해 밥 딜런(미국 포크록의 거장·반전 가수) 같은 청춘의 상징과 그 메시지를 깊이 검토해야 한다’고 썼다. 그 글을 읽으며 앞으로 기업들이 문화운동까지 잠식해 문화 속 미학적 영향력을 상품 판매에 깊이 연결시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김지하는 입사 후 석 달을 채우지 못하고 사표를 쓰고 나와 버린다. 출퇴근하는 직장생활이 도무지 자신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얼 하며 먹고살아야 하나,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고민들이 밀려왔다.
그는 본래 대학을 졸업하고 ‘거리의 미학자’가 되려고 했었다고 한다. 이런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미학과의 김정록(金正祿) 교수였다. 김지하는 김정록 선생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감고 옛 생각에 잠겼다. 스승을 회고하는 그의 얼굴에 추억이 서렸다.
“지난 시절 살아오면서 내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어른들이라기보다 친구들이다. 하지만 유일한 스승이 있다면 바로 김정록 선생이다. 대학 1, 2학년 때 만날 술만 퍼먹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던 시절, 선생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길을 열어주려고 애쓰셨던 스승이었다. 선생은 김홍집(1842∼1896·갑오개혁을 주도한 조선 후기 문신)의 손자로 북경대학에서 곽말약(1892∼1978·중국의 시인 겸 극작가) 밑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곽말약은 모택동도 떨던 사람 아니었나. 어느 날 선생이 곽말약이 해준 말이라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예술, 과학사상은 완벽하지 않다. 앞으로 세계정세를 볼 때 서양과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동양사상을 공부해야 한다. 그렇다고 동양사상도 완벽한 것은 아니니 동서양 둘 다 받아들여야 한다. 머지않아 동양이 서양을 앞서는 날이 온다.’”
그러면서 스승은 김지하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대학원을 안 가도 좋고 대학 선생이 안 되어도 좋으니 공부는 계속해라. 네가 하는 판소리, 탈춤도 좋고 서양 것도 좋으니 공부해서 다 섞어라. 비록 크게 되지 않을지라도 그게 시작이 될 것이다. 너는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니까 (강단에 얽매이지 않는) ‘거리의 미학자’가 되어라.”
거리의 미학자가 되라는 스승의 말은 평생을 살면서 어느 조직에도 사람에도 휘둘리지 말고 혼자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으라는 삶의 지침을 제시한 것처럼 들렸다.
한 번은 김지하가 어느 겨울, 원주 집에서 며칠 불면의 밤을 지내다 스승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내용인즉 ‘괴롭다’는 것이었고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의 편지에 선생은 긴 답장을 보내주셨다.”
스승의 답장은 이랬다.
‘체관(諦觀·사물의 본체를 꿰뚫는 일)만이 해결의 길일세. 체관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용기가 필요하다네. 용기 또한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니 어른들이나 옛 사람들의 가르침이 그래서 필요한 것일세. 노자(老子)로부터 배우게. 허(虛)라는 것은 그냥 ‘허무’가 아닐세. 그것은 참다운 용기의 근원이요, 체관의 문(門)이라네. 체관이 곧 삶의 문이니, 지금 곧 서점에 가서 ‘노자’를 사다가 읽고 또 읽도록!’
김지하는 당장 노자를 사다가 통독했다고 한다.
기자는 이 대목을 들으며 방황하는 제자에게 이런 따뜻한 답장을 쓰는 스승이 있었던 그 시절이 문득 부러워졌다.
3개월 만에 직장에서 뛰쳐나온 김지하는 문화운동을 하며 살기로 한다. 그러면서 떠오른 것이 각 대학교 연극반을 상대로 학생극을 전업으로 하는 연출가로 사는 것이었다. 부업으로 전국 대학교에서 이뤄지는 연극공연들을 정기적으로 알리는 일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생계는 연극 연출료로 해결하고 대학생 연극을 민족문화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어 문화운동도 자연스럽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서울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문리대 연극반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지하가 이런 구상을 이야기하자 후배들은 “당장 한 편을 해보자”고 했다. 이때 고른 작품이 김영수(1911∼1977·극작가)의 ‘혈맥’(1946년 발표된 3막4장의 희곡. 일제 때 방공호에서 살아가는 하층 인간들의 삶을 그렸다)이었다. ‘혈맥’은 이듬해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 봄 학기 공연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그 무렵 김지하는 후배 김민기(학전 대표)와도 인연을 맺는다. 배우 신성일의 친동생이기도 한 미대 회화과 강명희(66·화가) 집에서 판화가 오윤(1946∼1986) 임세택(66·화가·전 서울미술관장) 등과 김민기의 노래를 듣게 된 것이다. 김지하의 말이다.
“민기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갓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찢기고 헤진 청바지에 잠바를 걸치고 기타를 치면서 세 곡을 연거푸 불렀다. 두 곡은 ‘길’ ‘혼혈아’라는게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 하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깊고 애잔한 저음이 듣는 사람을 우울하고 슬프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판화가 오윤이 민기에게 ‘한국의 밥 딜런이 나왔다’고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몇 년 뒤 어느 한여름 날, 김지하는 서울대 의대 함춘원(조선 성종 때 창경궁 후원·현 서울대병원 안에 위치)에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김지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이 노래가 곧 금지곡이 될 것이고 자신의 삶 역시 거친 광야로 나서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의 예감은 모두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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