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볼대회는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최종 승자를 가리는 미 프로스포츠 최대 행사다. 올해는 2월에 열렸는데 세계 1억6000만 명이 시청했다고 하니 광고단가가 초당 1억 원이 넘는다. 웬만한 기업은 엄두도 못 낸다. 국내 기업 중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만이 광고를 했을 뿐이다.
삼성전자는 2분짜리 슈퍼볼 광고를 제작해 내보내는 데 1500억 원이라는 큰돈을 썼다. 이 정도 거래라면 삼성그룹 광고 계열사인 제일기획에 일감을 몰아주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노다지 광고는 미국의 광고회사가 가져갔다.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은 “세간의 생각과 달리 우리는 실력이 없어 광고를 만들지 못했다”고 땅을 쳤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시장환경이 바뀌었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TV 반도체 등에서 세계 1위의 글로벌 기업이다. 세계 최고의 기업과 협력업체를 상대한다. 제일기획은 국내 최대 광고회사지만 세계 순위로는 16위의 ‘안방 호랑이’다. 임 사장은 “삼성전자는 글로벌 관점으로 시각이 바뀌었다”며 “계열사라고 해도 세계적 광고회사와 경쟁할 실력이 안 되면 광고를 맡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능력이 없는데도 일감을 몰아줬다가는 소비자에게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슈퍼볼 광고 경쟁에서 고배를 마신 제일기획은 요즘 ‘국내 1위는 잊고 세계 16위를 기억하자’는 말을 한다. 2015년 ‘글로벌 톱10’ 진입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9단계 변화관리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세계 1등 광고회사의 매출총이익은 제일기획의 33배다. 10위 목표를 달성하자면 연간 30%씩 성장해야 한다. 국내시장에 안주하거나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의 내부 물량만 따내서는 이룰 수 없는 목표다. 임 사장은 “바닷물을 민물로 바꾸는 것과 같은 환골탈태(換骨奪胎)가 필요하다”며 “위기 체감, 생각의 전환, 사즉생(死則生)의 실행정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뼈아픈 실패가 창조와 혁신의 동력이 된 것이다.
제일기획을 바꾼 건 정치권의 엄포나 정부의 압박이 아니다. 소비자와 시장의 욕구다. 성공한 기업들은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 포드자동차의 창업자인 헨리 포드는 “종업원에게 임금을 주는 건 경영자도 주주도 아닌 소비자”라 했고, 월마트 창업자인 샘 월턴은 “기업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소비자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시장의 공정한 질서를 강조하는 경제민주화와 기업의 변화 및 혁신이 필수적인 창조경제를 풀어나갈 공통의 키 플레이어가 소비자인 셈이다.
소비자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투자에 나서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민간기업이다. 지한파인 기 소르망 파리정치학교 교수는 얼마 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창조경제의 시작은 연구소나 민간기업”이라며 “한국은 정부가 나서 창조경제를 주도하고 있지만 관료적인 방법으로는 혁신이 제대로 싹틀 수 없다”고 경고했다. 1970, 80년대처럼 정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은 세계 15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한국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다. 재계는 “가장 창의적이지 못한 집단인 정치권과 관료가 창조경제를 들고 나왔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부가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필요하지만 규제 일변도의 정책은 창조경제의 씨앗인 민간기업의 창의성과 활력까지 떨어뜨린다. 창조경제시대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부당 내부거래를 일삼거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은 소비자의 선택에 따라 아무리 덩치가 커도 도태할 수밖에 없는 공정한 경쟁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기업들이 소비자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창조적인 도전에 나설 수 있도록 규제를 푸는 것이 정부의 몫이다. 창조경제는 소비자의, 소비자에 의한, 소비자를 위한 경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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