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정훈]‘인민영웅 리석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8일 03시 00분


박정훈 사회부 차장
박정훈 사회부 차장
이민위천(以民爲天). 지난해 6월 후배 기자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51)이 사는 서울 사당동 D아파트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족자의 글귀였다. 폭 50cm, 길이 120cm 크기의 족자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벽에 걸려 있었다.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말로 ‘백성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뜻이지만 실상 이 말을 유명하게 한 건 북한 김일성 주석이다. 김일성은 1992년 4월 발간한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민위천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라고 했다. 북한 헌법 서문에도 ‘김일성 부자가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이 글귀는 주체사상 자체를 함축한다.

대표 종북주의자 집에 이보다 어울리는 족자가 있을 수 없다. 김일성 3대(代)가 인민을 하늘로 여겼는지와 상관없이 이석기의 종북 다짐은 그만큼 결연해 보였다.

이석기는 종북세력의 우두머리다.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했을 때 미국과 정부를 향해 핏대를 세운 게 바로 이석기다. 북한이 개성공단 직원을 볼모로 1300만 달러를 뜯어낼 때도 이석기는 국회에서 “북의 핵 보유로 6자 회담 같은 기존 해법은 실패했다”고 했다. 핵 보유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며 새로운 질서를 짜려고 하는 북한을 대변한 말이었다.

이석기의 종북활동은 2002년 민혁당 사건에서 뿌리가 드러난다. 그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채택한 민혁당 사건으로 2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공안사건이 많지 않았던 김대중 정부 때의 판결이라 조작 논란도 없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석기는 ‘미 제국주의를 축출한 뒤 현 정부 타도, 민족자주정권 수립, 북한과의 연방제 통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투쟁 목표로 활동한 민혁당의 핵심 인물이었다. 김일성 생일을 축하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대학가에 배포한 혐의도 인정됐다.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애국가가 입에 붙을 리 없다. 19대 국회 개원식에서 이석기와 김재연은 국기에 대한 경례 식순을 거른 뒤 나타나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가가 왜 국가냐”고 따진 탓인지 “립싱크”라는 말까지 나왔다. 입은 벙긋거리면 되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까지 할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어디에 ‘독재의 음기’가 서려 있다는 건지, 그들의 국가 정체성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아무리 욕을 먹어도 눈 하나 깜작 안 하는 건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의미다. 그들이 잘 보여야 할 대상은 다른 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연평도에 미사일을 쏴도 우리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게 그들이다.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며 지금까지도 김일성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대표 기관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국가 위협세력에게 세비까지 주는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런데도 여야가 3월 22일 공동 발의한 이석기·김재연 자격심사안은 40일 이상 방치되고 있다. 야당에서 ‘부정경선으로 기소되지 않았으니 자격심사 발의가 부적절하다’는 말이 나오는 건 여전히 그들이 국민 정서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종북을 ‘사상의 자유’로 착각하며 매카시즘 운운한 의원은 헌법부터 일독해야 한다. 이석기를 비롯한 통진당 의원과 수십 명의 보좌진이 지금도 국민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기밀을 다룬다는 생각을 하면 식은땀이 나야 정상이다.

대다수 국민은 이석기가 국민의 대표로 행세하는 꼴을 더는 보기 싫어한다.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가서 살아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남한에서 할 일이 남았겠지만 온 국민에게 욕먹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수 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인민영웅 리석기’로 대접받으며 살 수 있지 않겠나.

박정훈 사회부 차장 sunshade@donga.com
#이석기#종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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