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언론을 통해 미국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75년 10월이었다. 흉탄에 숨진 어머니를 대신한 23세의 퍼스트레이디를 뉴욕타임스가 인터뷰했다. 그는 “국민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필요한 내용은 아버지에게 전한다”, “아버지와 대화할 때 정치 얘기는 듣기만 할뿐 내 관심사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NYT는 “침착하고 성숙하며 자기 삶에 대한 명확한 철학을 갖고 있다”고 그를 평가하면서 “영어도 유창하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당시 한미 관계는 이런 우호적인 기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딸의 인터뷰 4개월 전 박정희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미국이 핵우산을 걷어 가면 한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깜짝 놀라 한국으로 달려온 제임스 슐레진저 미국 국방장관은 핵 개발 포기를 설득했다.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관계는 이미 1961년 5·16 직후부터 시작됐다. 카터 매그루더 주한 미 8군 사령관은 쿠데타를 용납할 수 없다며 ‘혁명군’에 원대복귀를 지시했다. 미국은 남로당 가담 전력이 있던 박정희의 사상까지 의심했다. 박정희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자 미국은 마지못해 현실을 인정했다.
박정희 정권이 반공노선을 분명히 하고 한일 국교정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미국의 태도는 조금씩 우호적으로 변했다.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박정희는 동갑내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마음을 잡을 회심의 카드를 던졌다. 훗날 공개됐지만 월남에 국군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처음으로 전한 것이다.
1964년 국군의 월남 파병이 시작되면서 미국과 박정희의 관계는 급속히 개선됐지만 밀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월남전 같은 군사적 개입은 더이상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닉슨독트린이 나오고 미소(美蘇) 간 데탕트(긴장완화)가 진행되면서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와 군사원조 감축을 추진했다.
유신체제 선포 후 박 정권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다. 미국 의회와 언론은 코리아게이트 청문회 등으로 박 정권의 치부를 끈질기게 파헤쳤다. 인권외교를 앞세운 지미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자 한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박정희는 미국의 인권문제 제기를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이며 강력히 반발했다. 또 “더이상 미국을 못 믿겠다”며 자주국방을 위해 방위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10·26 이후 “미국이 박 정권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김재규를 부추겨 박정희를 제거했다”는 의혹까지 나오게 된 배경이다.
박정희는 미국과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지자 미국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거침없이 주변에 털어놓았다고 한다. 박근혜도 미국에 대한 이런 아버지의 불편한 감정을 생생히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정치 입문 후 미국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대감을 드러낸 적이 없다. 오히려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듯하다. 정치적으로도 미국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정치적 고비마다 미국을 찾아 고위인사들을 만나거나 명문대에서 강연을 하면서 자신의 위상을 높였고 방미 중에 중요한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2009년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한미가 한반도의 군사적 안보만이 아니라 경제위기 기후변화 등 세계가 직면한 변화와 도전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밝힌 것은 이번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글로벌 파트너십’의 개념과 통한다.
박정희는 생전에 ‘못 믿을 우방’인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한미관계를 보다 수평적으로 바꾸려 했다. 이런 꿈은 집권 중엔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死後)에 한미관계는 몇 차례의 위기와 고비를 거치며 갈수록 대등해졌다. 미국의 일방적인 원조와 간섭을 받으면서 출발했던 한미동맹 60년도 막을 내렸다. 아버지와 미국 사이의 불화를 직접 목격한 박근혜의 불편한 경험이 긴 세월을 돌아 이제는 새로운 양국관계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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