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그들만의 행진곡이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9일 03시 00분


이기홍 사회부장
이기홍 사회부장
‘임을 위한 행진곡’을 퇴출시키려는 공무원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국가보훈처는 ‘3·1절 8·15경축식 등 정부 기념행사마다 공식 기념노래가 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에도 별도로 공식 주제곡을 만들겠다’는 이유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좌파단체, 특히 종북세력이 애창하는 노래를 정부 주관 행사에서 부르는 건 모양이 안 좋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둘째, 이명박 정부도 이 노래를 못마땅해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더 불편해하지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이 노래가 2004년 봄 386 출신 의원 당선자들이 노무현 청와대에서 합창한 것을 계기로 보수층의 심기를 거슬려온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판단은 옳지 않다. 옳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정부 탄생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자해행위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종북 좌파들의 노래가 아니다. 노래가 상징하는 5·18민주화운동은 종북 좌파들의 투쟁이 아니었다. 이 노래는 1980년 5월 전남도청에서 산화한 시민군 윤상원 씨를 추모하는 노래극을 준비하면서 만들어졌다. 고 윤상원 씨는 전남대를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다 사직하고 1978년 근로자 생활을 하면서 ‘들불야학’을 했다. 당시 들불야학에 다녔던 근로자들의 증언록을 보면 윤 씨 등이 꿈꿨던 것은 노동3권과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였다.

그 후 80년대 대학가에서 이 노래를 부른 학생들도 대부분 종북과는 무관했다. 1986년을 기점으로 주체사상파가 학생운동 지도부의 주도권을 쥔 것은 사실이지만, 대다수 학생, 특히 6월 민주항쟁 때 거리를 메운 학생과 시민은 종북이나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순수한 민주주의를 염원했다.

6월 항쟁 당시 학생들이 도로에 주저앉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때 서울 하늘에는 매일같이 하얀 눈이 내렸다. 초여름의 기상이변이 아니었다. 빌딩의 열린 창문마다에서 시위대에게 최루탄 가루와 눈물을 닦으라고 던져주는 티슈들이 함박눈처럼 날렸던 것이다.

그 시민들은 지금 40대,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되었고 그들 중엔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진 이들도 숱하게 있을 것이다. 5·18, 더 거슬러 4·19혁명에서부터 기원해 6월 항쟁으로 꽃핀 민주화 투쟁은 좌파들만의 성취물이 아니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현 야당만의 전리품도 아니다. 박근혜정부 탄생을 지지한 과반수의 국민들 가운데에도 이 노래에 ‘저작권’이 있는, ‘민주화 주주(株主)’들이 무수히 있는 것이다.

종북세력의 애창곡이므로 퇴출시키자는 생각은 독사가 마시는 샘물은 다 폐쇄시키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권이 민주화를 이룬 국민의 대열에서 스스로를 이탈시켜 이념적 토지 지분을 협소하게 만드는 행위다.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지만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데 왜 갈증을 자초하는가.

현 여권엔 전두환 독재 시절의 인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재야와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인사들도 많다. 산업화 세력이 이 노래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과잉반응이다. 민주화는 60, 70년대 기적적인 경제발전으로 중산층이 비약적으로 성장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박근혜정부는 국민 모두가 함께했던 민주화 과정의 유산이며 상징물 중 하나인 노래를 좌파에 헌납하려 하는가. 박근혜정부가 출범할 때 지식인들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건 정확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박근혜정부를 탄생시킨 힘 속에도 민주화 세력은 포함돼 있으며, 민주화 투쟁 정통성의 한 줄기가 흐르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제 그걸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란다. 임을 위한 행진곡 퇴출 같은 낡은 발상을 퇴출시키고 5·18 기념식에 직접 참가하는 게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채널A 영상]‘임을 위한 행진곡’, 여야 모두 “퇴출 안 된다”

#임을 위한 행진곡#국가보훈처#5·18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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