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 준비하던 조영래, 법전 덮고 장례투쟁에 나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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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24>전태일 분신

생전의 전태일 모습. 동아일보DB
생전의 전태일 모습. 동아일보DB
1970년이 저물어가던 11월 13일이었다.

김지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아우이자 그 전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조영래가 급히 보자고 해서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 입구 이층 찻집으로 들어섰다. 장기표 이종률 심재택도 함께 있었다. 다들 표정이 침통했다. 김지하가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 묻자 조영래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동대문 평화시장 앞길에서 전태일이라는 노동자가 분신자살했습니다. 시신이 지금 명동성당 구내 성모병원에 있는데 내일 서울대 법대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을 앞세워 평화시장을 거쳐 청와대까지 행진하려 합니다.”

훗날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에는 전태일의 최후가 이렇게 그려져 있다.

‘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반경,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내려왔다. 갑자기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 그는 까맣게 탄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는데,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 어머니는 내내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태일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댔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을 마시면 화기(火氣)가 입속으로 들어가 영영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갈증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가제에 물을 적셔 입을 축여주었다. … 전태일은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 힘없는 소리로 “배가 고프다”고 했다. 평생을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보지 못했던 그였다. 배가 고프다는 한마디, 그의 스물두 해의 고통을 말해주는 이 한마디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김지하는 조영래에게 “내가 할 일이 뭐냐”고 물었다. 조영래가 “조시(弔詩)를 써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김 선배는 ‘오적’ 때문에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좌경 문인으로 몰고 있다. 이번에 조시까지 쓰면 틀림없이 빨갱이 시인으로 못 박힌다. 그러면 앞으로 할 합법 투쟁에서 선배가 일을 못 한다”는 거였다.

일행들이 논쟁을 벌이는 사이 김지하는 슬그머니 구석 자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종이를 앞에 놓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을 ‘불꽃’이라 붙였다. 조시는 후배들이 대신 읽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1월 14일 서울대 법대에서 열려던 전태일 장례식은 11월 20일에야 법대 학생장으로 열린다. 조영래는 이날 김지하의 시 ‘오적’을 연상시키듯 ‘전태일을 죽인 박정희 정권, 기업주, 어용노총, 지식인, 모든 사회인 등 5대 살인자’를 고발하는 시국 선언문을 썼다.

그렇다면, 당시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 상황은 어땠을까. ‘전태일 평전’은 이렇게 전한다.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 일했다. 야간작업을 하는 일도 허다하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업주들이 어린 시다들에게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일을 시키는 것도 이런 때이다.… 손목이 시어 견딜 수가 없고 심한 경우에는 점심 먹을 때 젓가락질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미싱사의 손가락 끝은 살갗이 닳고 닳아서 지문이 없다. … 손가락 끝이 빨개져 누르면 피가 솟아나온다. 하루 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지럼증이 나고, 장딴지가 띵띵 붓고 몸 구석구석이 쑥쑥 아리며, 힘이 빠져서 걸음을 걷기가 힘들다. 퇴근할 때 구두를 신으려면 부어 오른 발등이 구두에 들어가지 않아 억지로 구두끈을 졸라맨다. 미싱사들의 발등에는 거의 예외 없이 구두끈 자국이 남아 있다.’

1970년도에 전태일이 조사한 바로는 평화시장의 경우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건물에 환기시설이 하나도 없었다. 나쁜 작업환경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업주들이 다락에 설치한 공장이었다.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에서 ‘이 다락방 작업장이야말로 한국의 저임금 경제가 딛고 선 냉혹한 인간 경시, 인간 비료화(肥料化)를 상징한다’고 썼다.

‘한창 발육기에 있는 어린 여공들이 더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되면 기업주들은 게으름 부린다고 나무라기 일쑤였으며, 병이 깊어져 일도 못하게 되면 치료는커녕 사정없이 해고시켜버렸다. 몸이 아픈 여공들이 전태일에게 통증을 호소할 때 전태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돈을 털어 약을 사주거나 여공이 할 일을 자신이 대신하거나, 그럴 형편도 못 되면 그저 참고 일하라고 달래는 것뿐이었다.’

조영래는 전태일 분신 소식을 듣고 법전을 덮었다. 조영래가 평전에 쓴 ‘전태일이 바라는 세상’은 조영래가 바라는 세상이기도 했다.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인간의 나라였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 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 그것을 전태일은 바랐다. … 그가 항상 ‘나의 전체의 일부’라 불렀던 소외된 밑바닥 인간들, 저주받은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들, 불쌍한 현실의 패자들을 전태일은 너무나도 뜨겁게 사랑하였다.’

70년대 한국산업화의 그늘을 상징하는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사회운동에도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정치인, 명망가, 지식인의 전유물이던 민주화운동이 소외받는 사람과 서민들에게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신 사흘째 되던 1970년 11월 16일 서울대 상과대학생 40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한 것을 시작으로 대학가가 달아올랐다. 11월 20일 서울대에 무기한 휴교령이 떨어졌다. 기독교계까지 들고 일어났다. 11월 25일 신구교 합동 추도 예배에서 김재준 목사는 “오늘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말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빈사상태나 마찬가지였던 한국 노동운동이 일어나는 불쏘시개가 됐다. 신문, 방송, 잡지 등도 특집기사와 논설을 쏟아냈다. 조영래의 말대로 “마치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노동문제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생겨나기나 한 듯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지하#조영래#전태일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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