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방글라데시 건물 붕괴 참사에 전 세계가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이들이 느끼는 슬픔에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깔려 있다.
지난달 24일 수도 다카 외곽 사바르에서 라나플라자가 무너질 당시 이 건물에 입주한 5개 의류공장에는 약 4000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희생자도 대부분 의류공장 노동자들이다.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사건 하루 전 건물 벽에 심각하게 금이 간 것이 발견됐다. 이 건물에 입주한 한 은행의 지점장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24일 문을 닫았다. 그 덕분에 은행 직원 11명은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의류공장 사장들은 “미싱을 계속 돌려야 한다”고 직원들을 다그쳤다.
하루에 15시간 일을 하는 대가로 한 달에 37달러(약 4만 원)를 받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노동자는 뉴욕타임스에 “하루 일을 빠지면 하루 치 임금을 못 받는 데다 사장이 월급을 늦게 준다. 집세를 내고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려면 월급을 제때 받아야만 한다”고 토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방글라데시의 현실을 “노예 노동”이라고 통탄했다. 방글라데시는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값싼 옷을 만들어 주로 미국과 유럽에 수출했다.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서방국가들은 ‘근로환경을 개선하라’고 방글라데시 정부를 압박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8일 안전에 문제가 있는 공장 18곳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다.
이 사건을 보며 사람 목숨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무너진 건물에 깔려 덧없이 생을 마감한 사람들 하나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이었다. 공장 사장의 배를 불리기 위해, 선진국 사람들에게 더 싼값에 옷을 팔기 위해 버릴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한국은 방글라데시의 현재와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다. 국토는 좁고 천연자원도 없어서 사람의 노동력밖에 기댈 데가 없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값싼 물건을 팔아 외화를 벌었다. 1970년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당시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처지를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의 고통을 밑거름으로 후손들은 한결 풍요롭게 살고 있다.
이제 한국 기업들은 인건비가 싼 국가에 공장을 짓고 물건을 생산한다. 대부분의 기업주들이 법률과 양심을 지키며 공장을 운영하고 있겠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장들이 현지 노동자들을 핍박한다는 소식도 가끔 들린다. 적어도 한국인만큼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아픈 과거를 기억하며, 가난한 국가의 국민들을 울리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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