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반도 남부에는 유명한 휴양지가 많다. 한겨울에도 기온이 4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항구 도시 얄타에는 제정 러시아 황제(차르)가 여름 궁전을 두기도 했다. 겨울 휴가 때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18, 19세기의 크림 반도는 전쟁터였다. 이곳을 거점 삼아 발칸 반도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저지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전쟁이 자주 터졌다.
1853년 5차 전쟁이 시작됐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으려고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 다국적 전쟁으로 비화했다. 그래서 ‘크림 전쟁’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 전쟁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등장한다.
오늘날 간호사들을 ‘백의의 천사’라 한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흰색 옷을 입지 않았다. 그가 인류애만을 생각하며 적군, 아군 구분 없이 부상자를 돌본 것도 아니다. 그는 열악한 병원의 인프라부터 구축했다. 약품을 빼돌리는 관료들과 투쟁했다. 보급물자가 엉뚱한 데로 새지 않도록 관리했다. 무너진 병원 규율을 다잡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병사들의 사망률은 크게 떨어졌다.
150년도 더 된 역사를 왜 꺼내느냐고? 최근 국내에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의 갈등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2018년부터 간호조무사 제도를 폐지하고, 간호 인력을 △간호사 △1급 실무 간호 인력 △2급 실무 간호 인력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특성화고나 간호 학원을 나오면 2급 실무 간호 인력이 된다. 2년제 전문대를 나오면 1급이 된다. 일정 기간 현장 경험을 쌓으면 시험을 거쳐 2급에서 1급으로, 1급에서 간호사로 ‘승격’할 수 있다.
이 승격 조항이 간호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누구나 간호사가 될 수 있다면 정식 대학에서 전문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항변이 나온다. 심정적으로 공감이 간다. 오죽하면 “간호조무사가 간호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도 의사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하겠는가.
하지만 이 관점에 모두 동의하진 않는다. 조선시대의 고리타분한 신분제도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만약 오랜 경험을 쌓은 간호조무사가 학문적 토대를 갖춘다면 간호사가 될 기회를 주는 게 옳다는 의견도 많다. 지금은 신분사회가 아니니까!
연간 배출되는 간호조무사는 3만5000여 명. 이 중 3만여 명이 간호학원 출신이다. 학원은 학원 법의 적용을 받는다. 복지부의 영역 밖이다. 복지부는 학원이 제대로 교육하는지 실태 조사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자격 미달의 간호조무사가 양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게다가 간호사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큰 대학병원이야 그렇지 않지만, 지방의 중소병원이나 개인의원들은 간호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일부 의원은 비용을 줄이려고 ‘햇병아리’ 간호조무사만 쓴다.
의료 선진국에서는 환자 간병이 간호 인력의 업무다. 간호사가 충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국내 병원의 경우 간호사 1명이 담당하는 입원환자는 15∼20명이다. 미국의 5명, 일본의 7명보다 훨씬 많다.
이 모든 점을 감안하면 간호 인력의 구조조정은 꼭 필요하다. 다만 전제조건이 있다. 모든 것을 오픈 테이블에 꺼내놓고 난상토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간호사 승격 시험에 대해서도 기존 간호사들이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는 조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간호사들의 자존심도 살리고, 환자들의 안전성도 보장된다.
간호사가 될 때 하는 ‘나이팅게일 선서’에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고, 환자들의 안녕을 위해 헌신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간호사든 간호조무사든 환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나이팅게일은 다친 환자의 상처만 보지 않았다. 낙후된 의료현실에 대해 먼저 고민했다. 그게 환자를 위하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댓글 0